(조선일보 2019.07.1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귀면와(鬼面瓦), 나정, 중앙문화재연구원.
고려 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신라의 건국신화를 실었다.
"고허촌장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다가가자 말은 사라졌고 큰 알이 있었다.
그 안에서 사내아이, 즉 박혁거세가 태어났다. 그가 자라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사람들이 그를 추대해 신라를 세웠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 신화를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왕계(王系)가 확립된 이후 왕실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박혁거세를 가공의 인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의 발굴 및 연구 성과로 본다면 신라의 성립 과정에서
혁거세 왕과 같은 유력한 인물이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경북 경주 시내에 있는 오릉(五陵) 남쪽에 나정이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초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나정 터에 박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유허비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세웠다.
2002년 경주시가 이 비각의 담장을 정비하기로 계획하면서 발굴을 진행했다. 땅속엔 신라 건물지가 숨어 있었다.
평면 형태가 팔각형이란 점이 특이했다. 한가운데에 네모난 돌판이 놓여 있어 우물의 뚜껑이라 여겼는데 그 밑에선
우물 대신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됐다. 이 건물지 아래에 더 이른 시기의 시설물 흔적이 드러났다.
유적 곳곳에서 귀면와(鬼面瓦), 당삼채 등 유물 1400여 점이 쏟아졌다.
발굴 성과가 공개된 후 이곳이 나정 터인지, 혹은 시조의 제사를 거행하던 신궁(神宮) 터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발굴이 끝난 지 15년이 흘렀지만 유적의 성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신화의 숲'은 크게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다.
발굴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밝히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개인적 호기심이나 사회적 관심 때문에
그 오랜 세월 잘 보존돼 왔던 신화의 공간을 파괴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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