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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5] 이민족 神까지 모시는 판테온… 관용 사라지자 제국도 무너졌다

바람아님 2019. 8. 29. 09:58

(조선일보 2019.08.29 로마=송동훈 문명탐험가)


[로마 제국 관용의 상징, 판테온]

이민족 神까지 모시는 판테온… 관용 사라지자 제국도 무너졌다


귀족파·평민파 권력투쟁 - 민중 동원한 길거리 투쟁 일상화
군대마저 개입해 무자비한 싸움… 결국 공화정 무너지고 황제 등장

아우구스투스, 관용을 국시로 천명 - 로마가 정복한 모든 지역의 신을
이건 맛의 대참치! 동원참치!
인정한다는 의미로 판테온 건립, 다양성 공존하는 제국 가능케 해

다신교 전통 포기하며 제국 멸망 -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뒤부터
제국에 활력 주던 관용 사라져… 판테온은 교회로 바뀌어 생존


송동훈 문명탐험가로마에서 판테온을 찾아가는 길은 시간 여행과 같다.

현재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출발해 바로크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고

중세를 지나 고대 로마제국에 도착하는 흥미진진한 시간여행.

여행은 코르소 거리(Via del Corso)에서 시작된다.

로마의 심장부인 베네치아 광장에서 북쪽 관문인 포폴로 광장까지 이어지는 이 거리는 로마의 중심 도로다.

화려한 장식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온종일 관광객과 자동차로 붐빈다.

천천히 걷다 보면 프랑스의 대문호 스탕달이 왜 이 거리를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찬미했는지 공감하게 된다.

거리 곳곳에 판테온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포폴로 광장으로 향하고 있다면 왼쪽 방향이다.

이정표를 따라 코르소 거리를 벗어나면 순식간에 자동차들이 사라지면서 또 다른 로마가 펼쳐진다.

바로크와 르네상스, 중세의 고풍스러운 로마다. 판테온은 그 모든 길이 만나는 로톤다 광장 한가운데 서있다.

거대한 원형 돔과 쭉쭉 벋은 그리스·로마 건축 양식 열주들이 조화 속에 완벽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멋지다.

로마시대로 돌아온 듯하다. 이곳에서는 로마시대를 감상하기 위해 상상력을 짜낼 필요가 없다.

판테온이 건축 당시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수십만 명의 여행객들이 판테온을 찾아오는

것도 상상력의 도움 없이 편안하게 로마의 옛 모습을 즐기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판테온에서 진정 발견해야 할 것은 도시 로마를 제국으로 만든 '관용(寬容)'이라는 가치다.


로마의 권력 투쟁


로마에 내전이 벌어졌다. 자영 농민을 되살리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직후부터다.

로마 제국의 미래와 주도 세력, 운영 방식을 놓고 귀족파와 평민파가 대립했다. 정치 투쟁은 갈수록 치열해졌고,

법에 의한 통치, 원로원에서의 논쟁과 합의, 패자에 대한 승자의 관용이란 로마의 정치적 전통은 사라졌다.

민중을 동원한 길거리 투쟁이 일상화됐다. 당파의 우두머리인 마리우스(평민파)와 술라(귀족파)는 결국 군대마저 동원했다.

승자는 패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로마는 둘로 쪼개졌다. 이들이 한때 독수리 깃발 아래 전 지중해를 누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승리한 술라는 평민파를 궤멸시켰다. 승자는 끝이라 여겼지만 착각이었다.

귀족파는 변화된 제국의 미래에 걸맞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극소수 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치를 선호했다. 속주를 수탈의 대상으로 봤다.

급성장하는 경제활동 세력인 기사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도 못했고, 무너진 자영농 문제도 외면했다.


카이사르(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의 등장은 평민파 복원의 신호탄이었다.

통찰력, 지력, 용기, 인기, 가문을 모두 갖춘 카이사르는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있는 폼페이우스와 기사 계급의 후원자인

크라수스와 손잡고 로마의 정치판을 뒤엎었다. 삼두정치다(기원전 60년). 권력을 잡은 카이사르는 개혁 정치를 밀어붙였다.

허를 찔린 귀족파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꾀했다. 크라수스와 율리아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기회를 제공했다.

카이사르의 딸로 폼페이우스와 결혼한 율리아는 동맹의 상징이었다. 귀족파는 카이사르의 전공(戰功)과 인기를 시기한

폼페이우스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애당초 폼페이우스는 비전과 용기를 가진 리더가 아니었다.

의기양양해진 귀족파는 카이사르를 압박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넜고(기원전 49년), 승리했고, 암살당했다(기원전 44년). 로마는 다시 처절한 내전에 돌입했다.

악티움해전(기원전 31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기원전 63년~14년)가 최종 승자가 됐다.


관용의 제국, 로마


공화국은 껍데기만 남았다. 제1시민 옥타비아누스는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가 됐다.

그는 권력과 권위를 독점해 사실상 황제가 됐다. 새로운 피를 받아들여 원로원을 재편했고, 각종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로마와 속주의 공동 번영을 꾀했다. 그렇게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로마 혁명이다(로널드 사임·로마혁명사).

도시 로마도 벽돌의 도시에서 대리석의 도시로 바뀌었다. 많은 공공 건축물이 신축되고, 내전 기간 동안 방치됐던

도시 곳곳이 새롭게 단장됐다. 아우구스투스는 특히 세 개의 건물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화의 제단, 아우구스투스 영묘, 판테온이 그것이다.

평화의 제단(Ara Pacis)은 내전과 정복 전쟁이 끝나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상징했다.

로마제국의 존재 이유다. 아우구스투스 영묘는 황제 본인을 비롯한 카이사르 일족을 위한 무덤이다.

제국 로마를 이끌어갈 왕조가 누구인지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판테온을 지었다.

최측근이자 사위인 아그리파를 통해서였다.



자연은 장엄하고 황홀하다. 그 앞에서 인간은 왜소하다. 판테온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타인을 안음으로써 자연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판테온 앞에 설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부의 돔형천장(위 사진) 원형구멍을 통해 쏟아지는 빛줄기는 마치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길라잡이인 듯하다.

 /게티이미지뱅크


판테온은 '만신전(萬神殿)'이다. '모든 신을 모시는 신전'이란 뜻이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모든 지역에 존재하던 신, 모든 민족이 숭배하던 신을 위해 지어진 신전이다.

로마제국이 존재하던 고대에는 다신교(多神敎)가 대세였다. 유대교 정도가 일신교였다.

그런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판테온에 모셔진 신의 수는 엄청났을 것이다. 종교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누군가의

모든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황제는 판테온을 통해 관용이 로마제국의 국시(國是)임을 밝힌 것이다.

관용이 사라지자 제국도 멸망하다


로마 지도로마 지도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몇 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파괴된 판테온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한 건 하드리아누스 황제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년)는 로마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오현제(五賢帝)'의 세 번째 황제다. 팍스 로마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이때 판테온도 다시 지었다.

로마를 세계 제국으로 만든 관용의 정신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건축가를 자처할 정도로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하드리아누스는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완벽한

원형 돔의 판테온을 만들어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판테온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재빠르게 교회로 용도를 변경한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됐다.

처음부터 신전 건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오늘날도 이곳은 성스럽다.

열주 사이로 보이는 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운데 들어가면 돔 꼭대기의 원형 창을 통해 한 줄기 빛이

내려오다 어느 순간 포말처럼 흩어지면 신전 안을 은은하게 비춘다. 신기하게도 기도하기에 딱 적당한 밝기다.

공명(共鳴) 역시 완벽하다. 내부를 가득 메운 여행객들이 아무리 웅성거려도 시끄럽지 않다.

신전 전체가 마치 방음벽처럼 소리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그 옛날 제국 곳곳에서 로마로 몰려온 시민들은 이곳에서 편안하게 각자의 신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로마 역시 관용의 정신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년) 때 기독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건국 이후 천 년 이상 지켜온 다신교의 전통을

포기했다. 제국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던 관용의 정신도 시들었다. 로마제국은 얼마 후 멸망했다.


그 후로 수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로마만큼 관대한 제국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진보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오늘날에도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에 대한 관용은 사방에서 공격받고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로톤다 광장에 앉아 판테온을 바라보는 것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관용이란 보편적 가치를 얼마나 지켜나갈 수 있을까?


'황제의 분신' 아그리파, 판테온 등 걸작 건축물 남겨


아그리파 석고상판테온은 아그리파(Marcus V. Agrippa·기원전 64/62~기원전 12년)의 후원으로 건설됐다.

제국의 국시인 '관용'의 성전 건설을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위임받은 아그리파는 누구일까?

그는 생각보다 유명하고 친숙하다. 한때 미술학원에서 석고 소묘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석고상〈사진〉의 주인공이다. 그는 황제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아우구스투스를 대신해 전쟁터를 누볐던 황제의 '칼'이었고,

황제의 사위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일찍 남편을 여읜 무남독녀 줄리아를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기원전 21년).

그녀는 아직 10대였고, 아그리파는 40대 초반이었다.

이 결혼에서 3명의 아들을 포함한 5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황제는 외손자들을 양자로 삼아 제국을 물려주고자 했다.

건강했던 아그리파와 외손자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황제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생전에 아그리파는 황제를 대신해 제국 전역을 순방했고 각지에 신전, 극장,

수도교 등 다양한 건축물을 남겼다. 물론 판테온이 가장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