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9.04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백제사에서 성왕의 업적은 뚜렷하다. 근초고왕이 4세기를 대표한다면 6세기를 상징하는 인물은 성왕이다.
사비로 왕도를 옮긴 후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한 뒤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551년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신라·가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전쟁에서 이겨 숙원을 풀었으나 신라를 끌어들인 점이 불씨로 남았다.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 사리감, 국보 제288호, 국립부여박물관.
한강 상류 요충지를 장악한 신라는 2년 후 한강 하류의 백제 땅으로 진출했다.
믿었던 우방에 발등을 찍히자 성왕은 분노했다.
대신들의 반대를 뒤로한 채 태자 여창(餘昌)은 대군을 이끌고 충북 옥천으로 향했다.
한성 함락, 백제 멸망과 함께 백제의 3대 패전으로 손꼽을 수 있는 '관산성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신라의 지원군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여창이 고전한다는 급보에 성왕은 군사 50여 명을 대동한 채 전장으로 향하다 사로잡혀 죽었고,
시신 가운데 머리는 신라의 궁궐 계단 아래에 묻혀 뭇사람에게 밟히는 치욕을 당했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좌평 4명과 3만에 가까운 장졸을 잃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창은 부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즉위 후에도 오랫동안 은둔 세월을 보냈다.
그 무렵의 창왕에 관한 자료가 1995년에 공개됐다.
충남 부여 능산리의 한 절터에서 발굴된 사리감(舍利龕)에 '창왕의 누이가 부처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학계는 이곳을 성왕의 명복을 빌던 능사(陵寺) 터로 추정하고 있다.
관산성 패전은 백제에는 뼈아팠다. 패전 원인 중 왕의 '무모한 행차'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 도약하려던 백제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이 전투를 '관산성의 비극'이라 부를 수 있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균형추는 급격히 신라로 기울었고, 백제는 끝내 주도권을 되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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