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9.25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의 한 음식점 뒤뜰에서 화려한 금관이 출토됐다.
발굴은 아주 사소한 관심에서 시작됐다. 경주경찰서 순사가 흙더미 주변에서 아이들이 유물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 수소문 끝에 그 흙더미가 나온 공사 현장을 찾아냈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사지왕'명 칼집, 금관총, 국립중앙박물관.
경주경찰서장이 주재한 긴급 회의에서 고고학자가 아닌 경주 거주 일본인들이 유물을 발굴하기로 결정했고
단 4일 만에 금관, 금 귀걸이 등 수많은 유물을 수습했다. 당시까지 동아시아에서 이토록 화려한 금관을 발굴한 일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다만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어 무덤 이름을 금관총이라 부르기로 했다.
2013년 금관총 유물을 소장하던 국립중앙박물관은 놀랄 만한 사실을 공개했다.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하던 금관총 장식 대도의 칼집에 '尒斯智王(이사지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사지왕이란 이름이 역사 기록에 없다는 점은 문제로 남았다. 학계에선 무덤 연대를 기준으로 자비왕 또는
소지왕으로 보기도 하고, 왕보다 지위가 낮은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어 2년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금관총을 다시 발굴하는 과정에서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진 칼집 조각과 일제강점기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물을 여러 점 더 찾아냈다.
이 발굴을 계기로 금관총에 묻힌 인물이 이사지왕이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사지왕'명 대도는 녹이 슬고 부서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아울러 발굴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시점에 명문을 확인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뒤늦은 발견이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인물, 신라 이사지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역사를 만들었을까. 앞으로 연구가 진전되어 이사지왕과 그의 시대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고,
무덤 이름도 금관총에서 이사지왕릉으로 바뀔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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