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0.09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서기 501년 11월 백제에 위기가 찾아왔다.
사냥 나간 동성왕이 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머지않아 목숨을 잃었다.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백성들은 동요했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나 백가의 목을 베고 왕위를 이은 인물이 무령왕이다.
그는 추락한 왕권을 안정시켰고 고구려와 가야에 빼앗겼던 영토를 대부분 수복했다.
그러나 무령왕에 관한 역사서의 기록은 소략해 왕의 나이조차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준 것이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誌石)이다.
지석에는 왕이 62세 되던 523년 5월 7일 목숨이 다해 525년 8월 12일 능에 안장되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장례를 27개월 동안 치른 것이다. 왕보다 늦게 세상을 뜬 왕비의 장례 기간도 비슷하다.
연꽃무늬 수막새, 정지산 유적, 국립공주박물관.
입관 후 매장 이전까지를 일컫는 빈(殯)이 이토록 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계에선 백제가 여러 나라에 부고를 띄우고 조문 사절을 받기 위해 장례 기간을 늘렸을 것으로 보거나 혹
은 성왕의 왕권이 미약했기에 선왕의 권위를 빌려 그 기간 동안 통치 기반을 다졌을 것으로 해석하는 등 설왕설래했다.
1996년 가을 무령왕 부부의 빈에 관한 새로운 견해가 제기됐다.
무령왕릉에 인접한 정지산에서 발굴된 기와건물지가 무령왕 부부의 빈전(殯殿)이라는 주장이었다.
해당 건물지에는 45개의 기둥 흔적이 있어 구조가 특이했고, 국가의 중요 시설에만 쓰인 연꽃무늬 수막새가 발견됐다.
가야나 왜에서 가져온 토기, 무령왕릉 축조에 쓰인 전돌도 출토됐다.
그 후 이 유적을 빈전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졌으나 근래 백제의 방어 시설로 보거나 영빈관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됐다.
빈전이 궁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반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백제는 외래문화를 받아들일 때 백제 사회에 맞게 변용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령왕의 삼년상도 중국 예서의 그것과는 내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향후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더 치열해져 웅진기 백제 문화의 실체가 해명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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