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조선의 절제미 vs 청의 화려함..흉배 속에 권력 있다

바람아님 2019. 10. 27. 08:20

중앙SUNDAY 2019.10.26. 00:21

 

조선 흉배는 명나라 영향으로 작아
청나라는 앞여밈 때문에 3장 사용
"정서에도 좋은 명상" 미국서 인기
정영양 관장 "마케팅과 결합하고파"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 재개관전
흉배(胸背). 관복(官服)의 앞뒤로 붙이는 가로 세로 30cm 내외의 이 정사각형 천조각에 왕조의 권위와 위계질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고 장인들의 자수 바느질 솜씨로 구현한 당대 디자인의 정수이기도 하다. 흉배 속 배경은 구름과 괴석과 물인데, 이는 곧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배한다는 의미다. 새겨진 동물 문양의 경우 날짐승은 문관, 길짐승은 무관을 상징한다.

청나라 흉배엔 기마민족 스타일 담겨

24일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 재개관전‘제왕의 사람들: 한국과 중국의 관료 복식’에서 만난 정영양 관장. 뉴욕에서 한국 자수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신인섭 기자
조선과 청나라의 흉배 스타일을 한눈에 보며 양국 문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의 재개관 특별전 ‘제왕의 사람들; 한국과 중국의 관료 복식’전(10월 24일~12월 27일)이다. 숙명여대박물관 소장품인 흥완군(흥선대원군의 형)의 복식과 정영양자수박물관이 소장한 청나라 관복 및 흉배, 흉배가 그려진 관복 차림의 양국 관료들 초상화, 관복을 차려입은 관리들의 사진을 통해 그 사회문화적 차이를 입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흉배 부착은 단종 2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관복은 여밈이 옆에 있어 흉배를 앞뒤로 달았습니다. 반면 청나라 관복은 만주족 스타일로 옷 중앙에 여밈이 있어 앞쪽에는 흉배를 반으로 갈라 달았죠. 총 3장이 필요했던 이유입니다.”

리모델링 때문에 전시를 1년 반 동안 쉬었다가 재개한 정영양(83) 관장의 설명이다. 그는 이어 “명나라 흉배에는 유교적 절제미가 담겨 있는 반면 청나라 흉배는 기마 민족 특유의 권위적이고 화려한 무늬가 특징”이라며 “조선은 명의 스타일을 계승해 자연친화적 문양을 담고 있으나 흉배의 크기는 명보다 작다”고 덧붙였다.


단오절 축제용으로 제작된 명나라 흉배는 보기 힘든 귀한 작품으로, ‘다섯 가지 독’을 뱀·두꺼비·도마뱀·전갈·지네로 형상화해 나쁜 일을 쫓는 ‘벽사(僻邪)의 의미를 담았다. 청나라에서는 남편이 관직에 있을 경우 부인도 남편 직위의 흉배를 부착할 수 있었는데, 부부 흉배 초상화 및 부인 흉배 역시 이번 전시의 볼거리다. 정 관장은 “흉배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만 있는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았던 일본에는 흉배가 없다”고 말했다.


24일 오후 열린 개막식에는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강정애 숙명여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중국 학생들과 함께 내한한 베이징복장학원 왕치(王琪) 교수는 “중국에서도 보기 힘든 복식 자료가 많아 매우 흥미로웠고 학생들에게 교육 효과도 높았다”고 밝혔다.


설원재단 설립해 자수 보급 앞장

① 조선시대 당하관이 사용했던 ‘단학문흉배’. ② 중국 명대 단오절 흉배. 나쁜 일을 쫓는 ‘벽사(僻邪)의 의미가 담겨있다. ③ 중국 청대 ‘오품문관백한흉배’. [사진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
정 관장은 자수 전문가이자 자수를 연구하는 학자다. 1960년대 서울에서 직업인으로서의 자수 인력을 양성했으며, 일본·이란·이집트에 한국 자수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69년 미국으로 건너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텍스타일 연구소에서 서양과 동양의 자수를 연구했다. 1976년 뉴욕대에서 ‘중국·일본·한국 자수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이라는 논문으로 예술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자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워싱턴 스미소니언 뮤지엄 등에 소장돼 있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자수를 놓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만져보고 뜯어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수집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모은 수많은 작품을 숙명여대에 기증했고요. 뒷면에 견사자수가 있는, 전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거울도 그 중 하나죠.”


2011년 뉴욕에서 설원(雪園)재단을 설립해 한국 자수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양국 자수인 교류 및 교육, 보급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7년 스미소니언 뮤지엄 이사로 선출된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변은영 설원재단 기획이사는 “미국에서도 규방공예쯤으로 여겨지던 자수를 다양한 저서 출간을 통해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메트로폴리탄·스미소니언·뉴왁·아트 앤 디자인 뮤지엄 등에서 다양한 자문을 하고 있고, FIT나 파슨 같은 패션학교, 미술대학 미술사학과의 초청도 이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재단 사무실이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수를 놓는 경험을 한국 교포는 물론 미국 중상층 여성들은 일종의 명상으로 여기고 있다. 자수가 아이들의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명문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고도 전했다.


정 관장의 꿈은 자수가들이 자수로 삶을 꾸릴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마케팅을 접목해 상품화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 원광디지털대 대학원에서 섬유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뉴욕에 초청했는데, 이중 두 명이 인생을 바꿔 살겠다고 열정을 보이고 있어요. 어려운 일이고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돕고 싶네요.”


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