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1.13. 03:13
- 켈트 시대 처녀를 제물로 바치던 곳
로마 시대엔 주피터 신전 자리.. 기독교化 된 뒤 생테티엔 소성당, 12세기에 마리아 대성당 들어서
- 200년간 건축, 프랑스 국민 성당
루이 7세, 헝가리 등 지원받아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 1944년 파리 해방 날 '테데움' 연주
- 800년 된 벽돌이 내는 빛과 소리
장미창으로 비치는 신비한 빛과 24km 오가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 마치 건물이 춤을 추는 듯 '황홀'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테섬은 종교적으로 늘 중요한 성지였다. 켈트 시대에 이곳은 드루이드 사제가 처녀를 희생물로 바치던 곳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와 주피터 신을 기리는 신전을 지었지만 동시에 켈트 신들도 함께 모셨다. 기독교화 이후에는 생테티엔(Saint-Etienne·스테판 성인) 성당이 자리 잡았다. 이 성당이 너무 협소해지자 12세기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대성당을 증축하게 된 것이다.
서기 1000년경부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을 괴롭히던 이슬람·바이킹·마자르족 등 외부 세력의 침략이 끝나 안정 단계에 들어가면서 경제가 살아났고, 동시에 종교적 열기도 달아올랐다. 이 무렵 각지에서 석조 성당을 건축했다. 글라베르(Radulfus Glaber) 수도사가 이 사실을 흥미롭게 기록했다. "마치 온 세상이 과거의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되어 교회라는 하얀 망토를 입은 듯했다." 그러니까 유럽 도시마다 중심부에 돌로 지은 흰 성당이 자리 잡은 것은 대략 이 시기에 시작된 일이다.
그 돌들은 근처 채석장이나 도시 지하에서 캐냈다. 파리만 해도 시내 여러 지역에서 돌을 캐내 석재로 썼기 때문에 지하가 공동(空洞) 상태인 곳이 많다. 유럽에서 많이 나는 석회암이나 대리석은 캐낸 직후에는 비교적 연해서 톱으로 썰고 다듬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유럽 각지에 석조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지만, 너무 단단해서 손질하기 힘든 화강암이 나는 우리나라에는 석조 건물이 많지 않다.
성모를 기리기 위해 200년 동안 건축
이 시기에 건조된 성당 중에는 마리아에게 바치는 성당이 많다. 이전에는 순교자나 성인에게 바치는 성당 위주였는데, 이제는 사방에 노트르담(Notre-Dame·성모, 영어로는 Our Lady) 성당들이 들어섰다. 마리아 숭배가 크게 확산된 것이다. 죄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는 어머니 같은 따뜻한 위안을 준다. "예수는 성모의 뜻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으며, 성모께서 바라는 바를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퍼졌다. 천사와 성인들이 보기에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도 성모께서 개입하시어 사면해 주시니, 그 앞에서 사람들은 비통함을 내려놓는다.
신학자와 수도사들이 이런 종교적 열정을 다듬어 체계적 교리와 의례를 만들어 갔다. 예컨대 스콜라 철학의 비조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1033~1109)가 주창한 '하느님 아들의 육화(肉化·Incarnation)의 필연성'이라는 교리에서는 마리아가 핵심 역할을 맡는다. 샤르트르 성당 학교에서 활동한 주교 풀베르(Fulbert)는 성모 탄신 축일을 강조하고 거기에 맞는 의례와 설교를 마련했다. 이 성당 학교 문헌에는 심지어 풀베르 주교가 병에 시달릴 때 성모가 현현하여 젖을 먹여 구원해 주었다는 기적 이야기도 전한다.
파리에 성모를 기리는 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한 국왕은 루이 7세다. 그는 왕국의 수도에 걸맞은 대성당을 짓기 위해 국고에서 거액을 지원하고 국내외에서 많은 자금을 끌어왔다. 이슈트반 국왕(재위 1000~1038)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헝가리는 아예 나라 전체가 마리아의 봉토(封土)라고 선언했고, 파리에 노트르담 성당을 건축한다고 하자 기꺼이 헌금을 보냈다. 1163년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축성과 함께 기공식을 한 이후 200년에 걸쳐 건축을 해나갔다. 돌을 다듬어 벽, 기둥, 아치를 쌓아 올리고, 성모·성부·성인·구약시대 족장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붙이는 일은 그야말로 돌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작업이었다.
프랑스 역사와 함께한 성당
노트르담 성당은 단지 파리를 위한 성당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성당으로 자리 잡아 갔다. 프랑스 역사의 중요 사건들이 대성당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루이 13세는 결혼 후 2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만일 후계자 아들을 주신다면 프랑스를 마리아에게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마침내 장래의 루이 14세가 될 아들을 얻자 '신이 주신 아이'라는 의미로 디외도네(Dieu-Donné)라 불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트르담 성당 중앙 제단의 성모상 오른쪽에 왕관을 바치는 루이 13세상, 그리고 반대쪽에 손을 심장에 얹어 신심을 표시하는 루이 14세상을 세웠다. 이 성당에서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고, 1909년 잔다르크를 복자(福者)로 시복했으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 26일에는 시민들이 모여 테데움(Te deum·신을 찬미하는 성가)을 연주했고, 1970년에는 드골 장례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예수의 가시관을 노트르담으로 옮긴 19세기 이후부터는 중요한 순례 장소로 떠올랐다(생트샤펠 편 참조).
2019년 여름 대화재로 큰 손상을 입기 전, 노트르담 성당은 분명 현존하는 성당 중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였다. 사방의 장미창을 통해 들어온 신비한 빛으로 물드는 내부 공간은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성스러운 분위기를 완성해 주는 것은 종교음악이다. 노트르담 성당 건축은 서양음악의 새로운 발전과 궤를 같이했다. 특히 1403년 이후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8000개가 넘는 파이프를 통해 나오는 오늘날의 오르간 소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노트르담 성당의 '대오르간 담당자(titulaires des grands orgues)'는 올리비에 라트리(Olivier Latry) 같은 세계 최정상급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주를 시작하면 파이프를 떠난 소리가 길이 120m, 폭 48m, 높이 69m의 공간을 날아가 반대편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고 다시 이쪽 벽에 부딪혀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파동이 벽에 충돌할 때마다 약간씩 에너지를 잃어가므로 결국 우리 귀로 들을 수 있는 범위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러기까지 오르간 소리는 24㎞를 여행하며 수초 동안 반향(反響)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주파수가 높은 고음부터 먼저 지워지고 저음은 약간 더 늦게까지 남아서 독특한 효과를 얻는다. 각각의 성당은 모두 다른 구조와 재질을 하고 있으므로 오르간 음악 또한 다른 음색을 낸다. 오르간 주자는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게 아니라 건물과 함께 연주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800년 된 돌집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음악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귀로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온몸이 음악 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몇 년 전 여름, 노트르담 성당에서 들었던 오르간 연주를 잊을 수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 보수 작업을 마치면 노트르담 성당은 다시 황홀한 빛과 소리의 조화를 만들어내겠지만, 그것은 분명 예전과는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소리일 것이다.
[비올레르뒤크, 20세기 건축 혁신 불러]
현재 우리가 보는 노트르담 성당은 엄밀히 말하면 중세 건물이 아니라 19세기 후반에 개축한 건물이다. 예전 건물은 프랑스혁명기에 많은 손상을 입어 폐허처럼 변했다. '파리의 노트르담'을 쓴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들이 성당을 비롯한 구(舊)파리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1843년 프랑스 문화부는 노트르담 성당 보존 사업 콩쿠르를 열었는데, 비올레르뒤크의 안이 채택되었다. 특별법으로 이 사업을 지원하는 가운데 30년에 걸친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서쪽 정면의 조각들, 첨탑, 내부 벽화가 새로 제작되었다. 주의할 점은 완벽하게 중세 건물을 복원한 게 아니라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원래의 노트르담 성당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모습,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이상화된 성당(cathédrale idéale)'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다만 괴물 형상을 한 가고일(gargoyle) 석상 54개를 제작해서 붙인 것은 건축가의 과도한 상상의 산물이다. 성당 주변 지역도 원래는 주택과 소성당 등이 얽힌 복잡한 구역이었는데, 개축 과정에서 많이 정리하여 오늘날과 같은 넓은 광장을 조성했다. 비올레르뒤크는 자신의 작업 내용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건축을 혁신한 르코르뷔지에가 이 책을 탐독했고, 가우디도 그 영향을 받아 바르셀로나에서 자신의 '이상화된 성당' 건축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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