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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2] 자신의 잘린 목 들고 간 순교자가 쓰러진 그곳에.. 성당이 일어섰다

바람아님 2019. 11. 1. 08:38

조선일보 2019.10.30. 03:12

 

[프랑스 생드니 성당]
- 이교도에 참수당한 파리 초대 주교
자신의 목 들고 찬송가 부르며 몽마르트르 언덕 위를 걷는 기적.. 200년 지나 5세기에 수도원 성당
- 사파이어·루비 반짝이는 지상 천국
고트족 이름 딴 고딕 건축의 효시.. 12세기 국왕 고문인 원장이 개축
베르나르두스 "화려하다" 비판

생드니 성당(Basilique royale de Saint-Denis)의 역사는 영험한 성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기 250년경, 드니(Denis)가 두 동료와 함께 파리에 초대 주교로 파견되었다. 그렇지만 드니는 이교(異敎)를 신봉하던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로마제국 관리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참수되었다. 그가 순교한 몽스 마르티스(Mons Martis, '순교자 언덕')는 후일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된다. 이때 드니 성인은 천사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부여받아, 자신의 잘린 머리를 손으로 받쳐 들고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는 기적을 선보였다. 그냥 걷기만 한 게 아니다. 입에서는 계속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몽마르트르 언덕을 넘어 파리 북쪽 외곽까지 먼 길을 걸어가서 쓰러진 곳이 현재의 생드니 성당 자리다. 200년 후, 파리의 수호 성녀 주누비에브가 이 근처의 땅을 얻어 수도원 성당을 지었고, 7세기에는 다고베르트 왕의 명령으로 드니 성인의 유물들을 안치하여 이곳이 순례 장소로 각광받았다. 다고베르트 왕 자신이 사후에 이곳에 묻힌 것을 계기로 이 성당은 프랑스 왕실의 묘소가 되었다.


이때의 생드니 성당은 현재 보는 바와 같은 장대한 건물은 아니었다. 우리 생각과 달리 중세 초기 성당들은 대부분 작은 목조건물이었다. 서기 1000년이 지나 인구가 크게 늘면서 기존 성당이 너무 협소해져 더 큰 공간이 필요해졌고, 그로 인해 각지에 성당 재건축 붐이 일었다.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는 고딕 양식이라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대형 성당들이 지어졌다. 생드니 성당이 바로 이 고딕 양식 건축의 효시에 해당한다.


고딕(Gothic)이라는 용어는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Goth)에서 유래했다.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낸 이 말은 중세 예술을 야만적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였다. 고트족이 로마를 공격하고 파괴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규범과 미적 균형이 깨져서 '괴물 같은 무질서'가 시작되었으며, 고딕 성당이 바로 그런 데서 나온 저급한 건축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엄하고도 화려한 고딕 성당을 지은 당시 사람들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수호성인 드니가 쓰러진 파리 북부 외곽에 세워진 생드니성당. 고딕 건축 양식의 초기 걸작으로 꼽힌다. /Zairon-위키피디아

생드니 성당의 개축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쉬제(Suger, 1081~1151) 수도원장이다. 그는 1122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후 1151년에 죽을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 직을 수행했으며, 동시에 루이 6세와 루이 7세 두 국왕의 고문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1136년 재건축이 시작되어 1144년에 마침내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르를 비롯하여 이 웅대한 성당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단지 건물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 아니다. 쉬제는 내부 장식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다. 프랑스 전역에서 최고의 목수, 금 세공업자, 보석 장인, 주물공들을 모아서 벽들을 찬란하게 꾸몄다. 하늘 높이 솟구쳐 있으면서 널찍하게 탁 트인 성당 내부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사방에서 빛이 흘러들었다. 이전에 어두컴컴하고 비좁았던 교회 내부는 빛으로 가득한 황홀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프랑스혁명 때 파괴당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었더라면 이 건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칭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토록 화려하게 교회를 꾸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이자 금욕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of Clairvaux, 1090~1153)가 정색하고 비판했다. 수도자와 신자들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아야지 현세의 아름다움에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실제로 베르나르두스는 오직 신앙 속에 파묻혀 있을 뿐, 이 세상의 일들에는 눈을 감았다. 제네바로 여행을 갔지만 그곳에 호수가 있는지조차 몰랐고, 4년 세월을 보낸 수도원의 식당 천장이 둥근지 네모난지 알 바 아니고, 백마를 타고 나흘간 프랑스를 가로질렀지만 그 말의 생김새나 색깔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구도자의 눈에 휘황찬란한 성당이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는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생드니에서는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렸지만, 신의 것을 신에게 돌리지는 않았노라."

(왼쪽부터)파리 초대 주교 성인 드니가 처형된 후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걸어가는 모습. 생드니성당 내부의 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 프랑스 역대 국왕과 왕비, 대귀족 등이 안장된 성당 지하의 왕실 묘지. 성당 내부 중앙의 아치형 천장과 신도석. /위키피디아·게티이미지코리아

베르나르두스와 쉬제는 대척점에 서 있다. 둘의 대립은 단지 믿음의 자세나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기본 질서가 어떻게 짜여야 마땅한가 하는 정치적·신학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쉬제가 수도원장이 된 1122년이 마침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로마 교황 칼리스투스 2세 사이에 보름스협약(Concordat of Worms)이 체결된 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황제와 교황 양측은 오랫동안 소위 서임권(敍任權) 투쟁을 벌여왔다. 주교와 대수도원장 임명을 누가 하느냐, 교황에게 권리가 있느냐 아니면 황제에게 권리가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지방 차원에서 보면 교회 재산을 놓고 벌이는 속된 싸움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세상의 질서를 짜는 데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를 놓고 벌어지는 거대한 투쟁이었다. 교황(교회 권력)이 최고 권위이고 황제(세속 권력)가 이에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보름스협약은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양측이 적당히 권리를 양분해 갖는다는 식의 어정쩡한 타협에 그쳤다. 생드니 성당은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답변이다.


생드니 성당을 최대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짓는 것은 단순히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곳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지상의 모형이었다. 벽면의 사파이어와 루비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드넓은 공간에 밝은 빛이 가득 넘치는 성당은 천국의 예시다. 이곳에 들어온 신자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천국을 부분적으로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이 중간 경유지에 왕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드니 성인의 품 안에 역대 국왕들이 함께 누워 있다. 하늘나라와 지상 세계의 중개자인 성인이 국왕과 함께 모든 백성을 인도한다. 세속 권력과 무관하게 교회가 독자적으로 영적인 인도를 해야 한다는 베르나르두스의 견해에 맞서 쉬제는 '제2의 그리스도'인 국왕이 신성한 힘을 받아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쉬제는 고딕 성당 속에서 왕권과 교회의 새로운 동맹을 추구한 것이다.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다. 고딕 성당은 종교의 힘을 끌어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연구자들은 고딕 성당 건축의 첫 번째 흐름이 1135~1225년에 파리 주변 200㎞ 내에서 퍼졌다가, 그 후 2차적으로 스트라스부르, 리옹, 알비 등 더 먼 지역으로 퍼져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국왕 권력의 확산과 고딕 성당의 건립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국왕 42명, 왕비 32명, 대귀족 63명, 충신 10명이 잠들어 있는 생드니 성당은 왕실이 주도한 고딕 혁명의 선구자였다. 프랑스 왕권이 성장해 가고, 또 혁명에 붕괴되는 역사가 성당의 돌에 오롯이 스며들어 있다.


[佛혁명 때 공격당한 성당] 국왕 42명·왕비 32명 시신은 파헤쳐지고…

생드니 성당은 프랑스 왕실과 연관된 핵심 장소라는 이유 때문에 프랑스혁명 당시 공격당했다.

혁명이 정점에 이른 1793년, 국민공회(國民公會, 1792~1795년 존립했던 혁명 의회)는 '지난 시대 왕들의 끔찍한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버리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미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언한 마당에 지난 왕정을 상기시키는 기념물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베르트랑 바레르 의원의 발의로 '혁명적 파괴' 운동이 시작되었다. 군중이 들이닥쳐 국왕 묘들을 열고 시체들을 손상한 후 공동묘지에 던져 넣었다. 푸아리에(Dom Poirier)라는 베네딕트회 출신 인사가 당시 사태를 관찰하고 기록을 남겼다. '루이 13세의 시신은 잘 보존되어 있었고 특히 수염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루이 14세의 시신도 비교적 잘 보존되었지만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국왕의 수염을 한 올 뽑아서 기념으로 가져갔다. 왕관과 왕홀 등 많은 보물이 발굴되었지만 대부분 녹여서 다른 용도로 썼다.


성당 건물 자체도 끔찍한 파괴를 겪었다. 한동안 성당 건물은 '이성의 전당'이라는 인위적 혁명 종교의 숭배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곧 폐허로 변했다. 나폴레옹 시대와 왕정 복고기를 거치며 국왕들 시신을 수습하고 건물을 수리하여 오늘날 모습을 되찾았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