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205호 ‘중원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라고도 한다. 한강 이남에 남은 중요한 고구려 유적이다. 언제 세워졌을까. 교과서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문자왕(491∼519) 즈음이라고 한다. 왜?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펼친 왕이다.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수도 한성을 쳤다. 고구려로 도망한 백제 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선봉에서 고구려군을 이끌었다. 위례성은 불타고, 개로왕은 아차산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475년 9월의 일이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그랬기에 역사학자들은 비석이 세워진 때를 장수왕과 그의 손자 문자왕 시기라고 철석처럼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비석에서 ‘영락칠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문구를 읽어냈다고 발표했다. 해석하면 ‘영락 7년, 해는 정유년’이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다. 영락 7년은 397년. 기존의 짐작보다 백년 정도 앞선다. 판독이 옳다면 역사적인 발견이다.
광개토대왕 때의 비라는 사실을 왜 짐작하지 못했을까. 영락 7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삼국사기 권18 광개토왕’의 기록.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공해 오자 왕이 정예기병 5000을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깨트렸다.” “4년 가을 8월 왕이 백제와 ‘패수’에서 싸워 크게 파하고 8000여급을 노획했다.” “9년 2월 연왕 성(盛)이 우리 왕이 거만하다 하여 병사 3만을 거느리고 습격했다.”
전쟁의 시대다. 패수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역을 확정짓는 핵심 키워드다. 위치를 둘러싸고 논쟁만 가득하다. 광개토대왕의 기록은 영락 4년에서 9년으로 건너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역사는 분명 존재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또 하나의 ‘사라진 역사’다. 우리는 역사 사실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을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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