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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6] 신분 낮아도 황제 될 수 있다는 '로마 정신'이 콜로세움 낳았다

바람아님 2019. 11. 20. 12:19

(조선일보 2019.09.19 로마=송동훈 문명탐험가)


[로마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 폭군 칼리굴라·네로 등장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후계자들은 재능·책임감 부족… 결국 군대 반란으로 네로 자살
- 권력 쟁탈전 끝에 새 황제 등극
신분 낮았던 베스파시아누스, 군에 투신해 무공 쌓으며 성장… 자신의 군단에 의해 황제 추대
- 원로원·민중의 동의 얻어내


귀족 출신 아닌데도 인정받자 황제는 네로의 황금궁전 자리에 시민 위한 콜로세움 세워 보답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콜로세움은 그 자체로 로마다. 거대하면서도 위엄에 가득 차 있다.

아름답고 실용적이다. 수천 년 풍상에도 여전히 매년 지구촌 곳곳의

수백만 명을 매혹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후대 인간들의 가혹한 약탈과 파괴로 외관의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첫 모습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와 맞닿아 있다.

'비아 사크라(Via Sacra·성스러운 길)'를 따라 포로 로마노를 통과해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지나면 마치 마법처럼

위용이 드러난다. 콜로세움은 4층이다. 1층은 도리아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 3층은 코린트 양식 열주다.

그리스·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세 건축 양식이 총동원된 셈이다. 정말 대단한 건 4층이다. 4층은 관객석이 아니다.

작열하는 남국(南國)의 태양으로부터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천막 고정 장치를 지탱하는 벽이다.

콜로세움은 이처럼 관객을 위한 서비스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춘 전대미문의 엔터테인먼트 시설이었다.

최대 5만 명을 수용했다. 그러나 콜로세움에서 로마 시민들에게 제공됐던 콘텐츠는 잔인했다.

이 거대한 원형경기장 안에서 검투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제국 각지에서 잡혀 온 동물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을 부르는 경기는 빈번했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로마 시민들은 검투 경기에 열광하고 환호했다.

현대의 도덕적 기준으론 이런 장면이 불편하다. 콜로세움을 찾는 많은 관광객 중 상당수는 죽음의 경기, 피의 축제를

즐겼던 로마인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런 잔인성과 향락에서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카이사르 가문, 대가 끊기다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재위 69~79년) 황제가 짓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재위 79~81년) 황제 때 완공됐다(80년). 10년 세월이 걸린 셈이다.

두 황제는 플라비우스 왕조(69~96년) 소속이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이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인 이유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콜로세움을 지은 이유는 출신 때문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이래 1세기 동안 제위를 계승해 온 전임자들과는

다른 유형의 황제였다. 그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신성한 핏줄을 물려받지 못했다.

전통적인 로마의 엘리트 계층인 원로원 출신도 아니었다. 그는 로마 근교 평범한 기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사 계급은 귀족과 평민 사이에 해당했다. 주로 상업과 금융에 종사했다. 상대적으로 출신 성분이 한미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떻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까? 급변하는 정세(政勢)와 자신의 능력이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2000년 가까운 긴 세월의 흐름을 묵묵히 이겨냈다. 비록 온전하진 못해도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옛 위상과 영광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로마 사회가 간직했던 유연성과 시민들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는 건설 목적 측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로마를 제국 로마로 변형시켰다.

초대 황제는 평화의 제단, 판테온,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지어 제국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여기에 따르면 제국의 목표는 평화와 번영, 제국의 국시(國是)는 관용, 제국의 운용 주체는 카이사르로부터 시작된

아우구스투스의 왕조였다. 세상은 인간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자라도 마찬가지다.

아우구스투스는 탁월했지만, 후계자들은 재능과 책임감이 부족했다.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재위 37~41년)와 5대 황제 네로(Nero·재위 54~68년)는 특히 심했다. 둘은 폭군이었다.

군대의 반란에 직면한 네로는 자살을 선택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핏줄은 단절됐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자신의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됐다.

제국 성립 이래 최초로 군대를 동원한 노골적인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월계관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돌아갔다.


한미한 출신의 군인, 황제가 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타고난 군인이었다. 어려서 군에 투신했고, 제국 전역에서 무공을 쌓으며 성장했다.

지금의 영국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 정복 전쟁에 참전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대대적인 반란을 진압했다.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거듭 중책을 맡겼다.

낮은 출신 성분 때문에 감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란 심리적인 안도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군 지휘관으로서의 업적과 신망은 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는 그를 황제로 선포했고, 그 후에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했다.

장군으로서뿐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감각이 뛰어났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신중하게 처신했다.


콜로세움권력은 잡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 로마는

시민의 자유와 공화국의 이상을 오랜 세월 간직해 왔다.

비록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지만 그 역사적·

정치적 토대는 유지됐다. 아우구스투스가 제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Princeps)'란 모호한 지위로,

'존엄한 자(Augustus)'란 개인적 권위를 강조하는

명칭으로 제국을 이끈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초기 로마의 황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의 황제와는

다른 존재였다. 로마에 아시아적인 개념의 절대적인

황제 제도가 도입된 건 로마의 위기가 가시화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부터다(284년).


베스파시아누스의 권력은 원로원의 지지와 민중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전통과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에서, 괜찮은 조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사 계급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원로원과 민중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들은 동의했다. 박수와 환호로 새로운 황제를 맞이했다. 내전에 대한 두려움,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도 여론을 움직이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오랜 세월 로마의 사회 시스템과 시민들의 인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유연성'이었다. 로마는 출신 성분보다 개인의 실력이 우선되는 사회였다. 공화정 시절부터 평민에게도 귀족과 동등하게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 열려 있었고, 집정관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다. 노예도 해방되면 시민이 됐고, 자신의 능력으로 기사 계급으로의 신분 상승도 가능했다. 동시대의 다른 문명 혹은 공동체들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사회적 유연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콜로세움을 시민에게 바치다


콜로세움을 로마 시민들에게 헌사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흉상.콜로세움을 로마 시민들에게 헌사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흉상. /위키피디아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원로원을 확대 개편했다. 로마의 지배층으로 자신처럼 신분은 낮아도 능력 있는 사람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콜로세움도 짓기 시작했다. 자신의 제위 계승을 인정해준 로마 시민들에게 바치는 감사 선물이었다. 전임자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네로의 황금 궁전 자리에 지었다. 아들인 티투스 황제는 콜로세움이 완공됐을 때 100일 동안의 축제로 이를 축하했다.


그로부터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화재, 지진, 약탈이 콜로세움을 할퀴고 지나갔다. 수많은 상흔에도 콜로세움은 여전히 경이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로마 제국이 그러하듯이. 이곳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잔인한 검투 경기가 아니라 콜로세움의 탄생 배경이다.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고대 신분 사회임에도 로마가 간직했던 사회적 유연성이다. 유연성이 존재했기에 로마는 오랜 세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을 좀 더 수월하게 해소할 수 있었고, 제국 전체의 통합을 이뤄낼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는 이 유연성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콜로세움을 반드시 한번은 가봐야 하는 이유다.


[제국 230개 도시에 '미니 콜로세움'… 로마는 문화로 통치했다]

로마제국은 힘으로 세워졌지만 힘만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다. 당시 기준으로는 월등하게 높은 문명의 스탠더드를 피지배 지역 곳곳으로 확산시켰다. 야만과 다른 로마식 삶을 보여줌으로써 피지배인들의 자발적인 선택과 참여를 유도했던 것이다.


로마제국 전역에는 콜로세움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시설이 세워졌다. 그중에는 베로나의 원형극장처럼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곳도 있다. 사진은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공연 중인 비제의 '카르멘' 중 한 장면이다. /randreu 위키피디아




'도시'가 제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국 곳곳에 건설된 로마식 도시는 로마와 유사한 인프라를 갖춘 '미니 로마'였다. 이 중에는 주민들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했던 원형경기장을 갖춘 도시도 상당했다. 현재까지 '미니 콜로세움'이 발견된 곳은 25개 국가, 230개 이상의 도시에 달한다.


연극을 상영하는 반원형 극장과 전차 경주에 이용하는 전차경기장도 각각 170여곳과 60여곳에서 발견됐다. 북이탈리아 베로나, 남프랑스의 님과 아를의 원형경기장처럼 오늘날에도 음악회, 투우, 연극 등에 사용되는 곳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