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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3년째 노숙인 찾는 ‘종각역 이동식 목욕탕’…“나눔보다 중요한 건 自立”

바람아님 2020. 1. 27. 18:56

(조선일보 2020.01.27 권오은 기자 권유정 기자)


대리기사 이대유씨, 3년째 노숙인 대상 ‘찾아가는 목욕탕’ 운영
이동식 ‘트럭 목욕탕’ 옆 간이 자율식당…목표는 自立
"무료급식 만연에 자립 의지 부족… 씻는 것부터 스스로 해결"


설 다음 날이었던 지난 26일. 노숙인 서너 명이 오전 11시쯤부터 서울 종로구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모였다.

커다란 백팩을 짊어진 이들은 손에 수건과 칫솔, 종이컵 등을 들고 있었다.

2.5t 트럭 앞으로 이내 줄을 선 이들은 "씻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노숙인 정모(41)씨는 "명절이라 봉사하는 사람들도 다 쉰다"며

"씻거나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아침부터 이곳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이 트럭의 정체는 이른바 ‘찾탕(찾아가는 목욕탕)’이다.

이대유(58)씨가 2018년 7월부터 3년째 종각역 근처에서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마다 운영하는 ‘이동식 목욕탕’이다.

이씨는 "노숙인이라고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다"면서

"무조건 혐오하고 배척할 게 아니라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주면 나아진다"고 했다.


26일 낮 12시쯤 서울 종로구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찾아가는 목욕탕’ 트럭이 세워져 있다./권유정 기자
26일 낮 12시쯤 서울 종로구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찾아가는 목욕탕’ 트럭이 세워져 있다./권유정 기자


◇ 밤늦게 운전하다 마주친 노숙인들… "스스로 아무것도 못 하더라"
찾탕은 2.5t 트럭을 개조해 만든 공간으로 1인용 샤워부스와 탈의실이 마련돼 있다.

물탱크와 보일러 펌프도 갖춰 따뜻한 물로 목욕이 가능하다.

최근 한 달은 추워진 날씨 탓에 보일러가 얼어버릴 수 있어 잠시 운영을 중단한 상태였지만 ‘씻을 수 있느냐’고 묻는

노숙인은 여럿 있었다. 이들은 이씨가 도착하자 능숙하게 물탱크를 채우고 내부 정리정돈을 도왔다.


노숙인 김모(48)씨는 "밖에서 지내다보면 마음 편히 씻을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면서

"특히 겨울에는 아예 씻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는 또 "매주 빠지지 않고 와주는 이씨한테 고마운 마음에 1년 전부터 자칭 스태프 노릇을 하고 있다"며

"트럭 내부 청소나 옆에서 운영하는 간이식당 천막 설치 등 간단한 잡일을 돕는다"고 했다.


대리기사 이대유(58)씨는 지난 2018년부터 노숙인들을 위해 ‘찾아가는 목욕탕(찾탕)’을 운영하고 있다./권유정 기자
대리기사 이대유(58)씨는 지난 2018년부터 노숙인들을 위해 ‘찾아가는 목욕탕(찾탕)’을 운영하고 있다./권유정 기자


디자인을 전공한 이씨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고 동시에 아내까지

지병을 얻자 사업을 시작했다. 작은 디자인 사무실을 열기 전 길거리 장사를 한 적도 있다.

이씨는 "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펜시 용품부터 버섯까지 팔아보지 않은 물건이 없을 정도"라며

"재기(再起)의 끈을 놓았느냐, 붙잡았느냐 차이일 뿐 노숙인이 거리로 나오기 전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이씨는 2018년 사업을 접고 대리운전 기사 일을 시작했다.

직업 특성상 주로 밤이나 새벽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노숙인을 자주 마주쳤다.

처음에는 만원이나 이만원을 건네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돈을 줘도 이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매번 노숙인의 몸에서 악취가 났다.


이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같은 모습으로 지내는 노숙인을 보면서 한두 푼보다

더 현실적인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무료급식, 무상배급 등 봉사 개념의 서비스가 만연해지면서 이들에게는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의지 자체가

부족했다.  최소한 씻고 먹는 것만큼이라도 스스로 힘을 다하게끔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다.


◇ 노숙인 800여 명 다녀가…목표는 나눔 아닌 ‘자립(自立)’
그날부터 이씨는 찾탕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트럭을 이동식 목욕탕으로 개조할 때 들어간 비용 약 2000만원은

주변 동료들과 지인들이 모아서 만들어줬다.

이후 운영비는 모두 이씨가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씨는 "전기값만 서울시에서 도와준다"고 했다.

찾탕 1회에 드는 돈은 약 40만원 가량. 한 달에 많게는 200만원까지 써야 한다.

그동안 홀로 운영비를 감당했던 이씨는 지난달부터 전국재해구호협회 후원을 받게 됐다.

트럭도 개인 소유로 있는 동안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 노숙인 자립을 돕는 ‘가교협동조합’ 소유로 바꿨다고 한다.


26일 서울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찾아가는 목욕탕’ 바로 옆에서 운영 중인 ‘간이 자율식당’. 노숙인들이 자유롭게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쌓여 있다./권유정 기자
26일 서울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찾아가는 목욕탕’ 바로 옆에서 운영 중인 ‘간이 자율식당’.

노숙인들이 자유롭게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쌓여 있다./권유정 기자


찾탕 옆에는 노숙인들이 자유롭게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간이 자율식당’도 함께 만들어졌다.

이 식당도 ‘자율’에 방점이 찍혀 있다. 라면이나 토스트 재료와 식기 도구만 이씨가 제공해 주고,

노숙인이 직접 조리부터 설거지까지 해야 한다.


이날 노숙인 최모(65)씨는 라면에 떡과 김치만두를 넣어서 끓여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율무차를 끓여 마셨다.

최씨는 "지난주 걸린 감기가 어지간히 안 떨어진다. 그래도 따뜻한 국물을 들이키니 조금 낫다"고 했다.

두부와 냉이나물을 넣고 끓인 된장찌개에 흰쌀밥은 말아먹거나 토스트에 계란후라이를 해먹는 노숙인들도 있었다.


이씨가 말하는 찾탕의 최종 목표는 ‘자립(自立)’이다.

이씨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준다거나 대신 뭔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본적인 도구와 공간만 제공하고 있는 것"

이라면서 "씻고 먹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라도 노숙인들 스스로가 직접 나서서 해결할 때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지가 마련된다고 본다"라고 했다.


실제로 찾탕을 이용했던 노숙인 김모(48)씨는 지난해 8월부터 직업을 찾았다. 거리 생활을 하고 1년 만이었다.

그는 "찾탕을 만난 뒤로 다시 사회에 나갈 의지를 얻었다"고 했다.

지난 연말엔 수년간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을 만나 송년회도 했다고 한다.

이날도 설을 맞아 인사차 들렀다고 했다.


이날로 찾탕은 총 88회차를 맞았다.

하루 평균 찾탕을 이용하는 노숙인 수가 10여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까지 연인원 약 800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지난해 서울시 전체 노숙인(3253명)의 네 명 중 한 명꼴이다.

그중 일부는 직업을 구하며 자립했고, 일부는 여전히 거리 생활을 하고 있다.


이씨는 재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이날도 다른 말 없이 윷놀이를 제안하며 노숙인들을 불러 모았다.

높게 던지는 윷을 보며 이들은 모처럼 웃었다. 서울 한복판 이동식 목욕탕에서 고향 집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