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인수위원회 없이 급히 출범한 정부라서 단순히 능력 부족인 줄 알았다. '국제협력을 주도하는 당당한 외교'를 핵심 정책 수단으로 천명할 때마다 불안감이 들기는 했다. 세상의 어느 나라가 할 수만 있다면 '당당'하고 '주도'적 외교를 마다하겠는가. 이런 외교를 실제로 밀어붙이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도 외교 목표와 수단을 착각하는 아마추어 정부라는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러다가 중요한 외교적 순간마다 국민을 기만하는 모습을 보며 이건 단순한 무능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세상으로 가기 위한 거대한 음모라는 직감이 들었다.
첫째, 2017년 4월부터 2018년 1월 사이 청와대와 정부는 미국 측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요구에 "개정 협상 개시를 위해서는 양국이 합의해야 한다"며 "FTA 상호 이익에 대한 공동 연구를 먼저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미 FTA는 '일방 당사국의 요청'으로 특별공동위가 '의무적으로 개최'되어 협정개정을 논의하도록 명시(제22조2항)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FTA 규정까지 무시하며 억지를 부리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FTA 폐기 카드'까지 꺼내들었고 한미 경제 관계는 파탄 위기에 몰렸다. FTA 재협상 국면을 이용해 한국 내에는 반미 감정을, 미국 내에는 반한 감정을 동시에 촉발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둘째, 한일청구권협정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위자료 배상 문제까지 해결한 것인지에 대한 해석이 갈릴 경우 '일방 당사국의 청구에 의해 국제중재로 회부된다'는 조항(3조)을 무시하고, 우리 측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중재가 개시되지 않는다고 버텼다. 협정상의 명백한 절차규정까지 위반하며 일본 측을 자극해 무역보복을 촉발한 것도 모자라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선언함으로써 반일ㆍ반미 감정이 들끓게 만들었다.
셋째, 북한 비핵화 정책을 정말로 '주도'하기 위해선 대북 제재와 협력의 수단을 균형감 있게 사용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북한과 미국 간의 대화에 끼어들지 마라' '설레발치지 말라'는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북한에 퍼주기만 하는 모습은 주도 외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의아하게 만든다. 탈원전을 통해 우리 스스로 핵관련 인프라를 없애버리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 주변 인물들의 입에선 '주한 미군 철수'나 '중국 핵우산론'까지 흘러나온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근 '개별적 북한 관광 자유화' 조치까지 꺼내들었다. 모든 문재인식 외교통상정책의 숨겨진 목표가 '남북한 연방제' 실현을 지원하는 데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넷째, 국내적으로는 검찰개혁을 빌미로 '유사 전체주의 한국'을 만드는 권력기반을 구축하려 한다. 전체주의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집권자 권력의 집중화와 초비대화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삼권분립 원칙을 무력화시키며 청와대가 법원과 검찰을 입맛에 맞게 부리는 권력기관 개편을 추진 중에 있는 것이다. 외교통상 분야의 적폐청산, 일본 때리기, 반미감정 자극 정책들은 이러한 정치권력 집중을 합리화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국가 이익까지 걷어찬 이념 편향 외교에 더해 국내 권력기반 공고화를 위해 외교통상 정책까지 동원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을 주권자인 국민이 얼마나 더 좌시해야 하는가. 정부 외교통상 자문체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청와대와 외교 통상 주무부처 간 일방적 명령체계가 아닌, 토론을 통한 전략 수립체제를 갖추는 일이 시급하다. 국내 이념정치적 고려가 외교통상 정책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국익개념에 입각한 정책 수립 및 집행 메커니즘을 속히 갖춰야 한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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