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기자수첩] '원자력 르네상스' 역행하는 한국

바람아님 2020. 2. 9. 10:05
조선비즈 2020.02.08. 06:02

원자력 발전이 기후변화라는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거세게 불었던 원전 축소 바람은 ‘지구 온난화’라는 난제에 부딪히면서 수그러든 분위기다. 원전 없이는 온실가스 감축을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원전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탈(脫)원전 본고장인 서유럽, 캐나다, 호주 등에서는 원전 재개 논의도 활발하다. 기후변화가 촉발한 ‘원자력 르네상스’가 올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원자력의 중요성을 알리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린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20년대 가장 큰 도전은 기후변화"라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원자력을 꼽았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원전은 온실가스 배출을 하지 않고 확장 가능하며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라며 기존 원자로보다 안전하고 저렴한 신형 원자로 개발에 투자해왔다. 사고 위험이 높은 기존 원자로의 단점은 기술개발과 혁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근 최악의 산불을 겪은 호주에서는 화재 원인으로 기후변화가 지목되면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호주 의회는 지난해 말 1998년부터 이어온 ‘원전 모라토리엄(탈원전)’ 정책의 부분 폐기와 함께 차세대 신기술 원자력 발전소를 승인해 달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탈원전을 추진 중인 독일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독일이 원전을 폐쇄하면서 석탄화력발전소를 추가 가동하는 바람에 온실가스 배출량이 연 3630만톤 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간 세계 34개국이 100기 이상의 원전을 새로 건설할 예정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기존에 원전을 보유하지 않았던 20개국도 원전 건설을 검토 중이다. 세계 원전 시장이 축소되기는 커녕 세계 각국에서 원전 건설 붐이 재개되는 추세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 원전 생태계는 침체에 빠졌다. 정부는 원전 해체산업 육성과 수출로 위기를 돌파하겠다고 했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원전 전문 인력이 3년 전부터 줄이탈하면서 차세대 기술 개발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원자력연구원의 경우 퇴직자만 연 80~1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원전 업계는 "인력 이탈로 지식의 공백이 커지면 중국, 러시아 등에 미래 원자력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출길도 막혔다. 지난해 말 한국을 찾은 미국 원전업체 웨스팅하우스의 경영진은 두산중공업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사우디, 체코, 폴란드 등의 원전 사업을 수주할 자신이 있다고 선언했다. 웨스팅하우스 측은 "미국 정부는 적극 지원하고 있는데, 한국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느냐"면서 탈원전 정책으로 한국의 원전 수출이 불리해졌다고 지적했다. 3년 전 파산 위기를 겪은 웨스팅하우스가 수출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고 큰소리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영국은 상업용 원자로를 세계 최초로 만든 ‘원전 종주국’이지만 1990년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원전 건설 능력을 상실해 현재는 원전을 수입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을 보유한 한국이 영국과 같은 길을 밟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60년간 쌓아올린 원전산업이 붕괴 위기를 맞았는데도 탈원전을 고집하는 정부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재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