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시론] 코로나 위기가 '100조 약발'보다 길어질 때…

바람아님 2020. 3. 31. 12:52

(조선일보 2020.03.31 김재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국가 예산의 5분의 1 규모 자금… 이 돈 다 쓰고 나면 그다음은?
같은 돈으로 더 실효성 있고 더 오래갈 방안 마련해야


김재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김재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코로나19 사태가 질병의 공포를 넘어 심각한 경제문제로 확산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각국에서

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돈 풀기로 위기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100조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지원 준비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진한 불안감은 현 위기 상황의 심각성 때문만이 아니다.

돈의 요물스러운 속성 때문이다.

쓰기 전에 넉넉하게 보이던 자금이 쓰기 시작하면 언제 어디로인지 모르게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부 씀씀이를 사전에 당사자들이 꼼꼼히 따져 준비하지 않은 경우 이런 일이 흔히 발생한다.

이때 돈은 처음의 반갑고 든든하던 '구원의 힘'에서 반목과 다툼, 허탈감과 절망감을 안기는 요물로 변한다.

만약 이번 사태가 100조원의 약발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그 기간이 예측 불가 상황으로 이어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지원금으로 연명하던 기업들이 지원이 끊겨 줄줄이 파산하기 시작하면 어찌 되는가?

실물의 추락으로 밀어닥칠 신용 경색과 금융 부문의 위기는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그때는 짧은 시간 내 많은 것이 절벽 앞에 와 있을 수 있다.


100조원을 앞에 두고 지혜를 한번 짜내보자. 더 많은 곳에 실효적 구제 혜택을 줄 수 있으며 더 오랜 기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문제의 핵심은 사태의 악화로 인해 기업의 신용 등급이 하락하면서 담보 가치가 떨어져 회사채 발행,

자금 조달이 어려워짐에 있다.

이때 총 지원 자금의 일정 부분을 출연해 '코로나19 대출보증 특별기금'을 설립하고 출연 자금을 담보의 일부로 하는

대출보증 업무를 담당하게 하면 어떨까. '특별기금'의 보증이 있으면 기업의 신용이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고,

그 결과 가치가 유지된 기업 자체 담보와 특별기금 보증을 합하여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실효 혜택을 받는 기업의 수는 현금 직접 지원의 경우에 비해 크게 늘어날 것이며, 지원 자금의 절약으로

지속 가능 기간도 늘릴 수 있다. 기업 신용 자료를 확보한 금융기관과 감독 당국, 정부 부처, 한국은행 등이 긴밀히

협조하여 추진해 볼 만하다.


다행히 금융 부문은 아직 상대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지난 1997년과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은행에 대한 강화된 규제와 자체 노력에 의해 은행의 확보 유동성과

일반적 건전성이 상당히 개선된 덕분이다.

문제는 부실채권비중제한과 최대예상손실액제한 등 규정의 강화로 은행들이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이 대출 연장, 회사채 매입 등 기업 유동성 공급을 통한 은행의 사태 해결 노력에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한국은행과 금융감독 당국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미국 연준의 경우처럼 한국은행이 양적 완화로 시중은행에

유동성 공급을 약속하고, 한시적으로 은행의 규제를 풀어주어야 한다.


'코로나19 대출보증 특별기금'의 설립과 운영, 한국은행과 감독 당국의 협조와 역할, 이 모든 것은 비상한 노력과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특별기금은 주 52시간의 제한 없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그리하면 우리 민족 특유의 헌신과 희생의

협동 DNA가 작동해 짧은 시간에 준비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원봉사자를 포함한 우리 의료진은 지난 2개월여 동안 크고 작은 악재와 난관 속에서도 묵묵히 비지땀을 흘리며

희망의 등불을 지켜 왔다. 향후 1~2주는 경제문제의 해결로 희망의 길을 열 수 있는 준비 기간이다.

이번 위기의 터널을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출발점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잃지 않고 남은 것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좌우할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30/20200330054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