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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66] ‘한낮의 공포’

바람아님 2014. 1. 29. 10:07

(출처-조선일보 2012.06.06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20세기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컸던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최소한 1000만명이 전사했다. 더 큰 비극은 그들 대부분이 청년 혹은 청소년이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5000만명이 죽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다. 1945년 이후에도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어서 중국, 베트남, 알제리, 중동, 앙골라, 모잠비크, 한반도 등지에서 또다시 5000만명 이상이 전쟁으로 인해 사망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후방에서 아들이나 남편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도 그에 못지않았다. 전시에 영국인들에게 자전거를 타고 전보를 배달하는 소년이 찾아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다음의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로 시작되는 나쁜 소식을 담은 통지서가 전보를 통해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전보를 '한낮의 공포'라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전보 배달부가 나타나면 "그가 그냥 지나쳐가기를, 그가 다른 집을 방문하기를" 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런 무정한 전보는 영국에서 1차 대전 시기에만 70만번이나 배달되었다.

전사(戰死) 통지도 나빴지만 실종 통지가 어쩌면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유명한 작가 루디야드 키플링은 1915년에 외아들 존이 로(Loos)전투에서 실종되었다는 전보를 받았다. 애끓는 부모가 아들의 행적을 열심히 찾았지만 끝내 그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존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그가 입 안의 부상으로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 전부였다. 마침내 발견된 존의 유해는 키플링이 실종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시 '신은 알고 계시다(Known unto God)'가 적힌 묘비 아래 묻혔다.

20세기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대개 전쟁을 경험했고, 전쟁의 기억을 안고 있다. 1953년의 휴전 이후 태어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어도 직접 전쟁을 겪지는 않았다. 늘 전쟁의 위협 속에 살면서도 실제로는 반 세기 이상 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평생 전쟁을 겪지 않고 살다 죽는 것은 인류 역사상 흔치 않은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인간은 스스로 지상에 지옥을 연출해 왔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이 시대에 우리는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처참하게 죽고, 남은 가족들이 슬픔에 겨워하는 일들이 조만간 끝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