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세계 각지의 도서관과 서점을 둘러볼 기회가 많았다. 장중하면서도 진지한 분위기로는 파리의 리슐리외 거리에 있던 프랑스 국립도서관 구관(舊館) 건물이 으뜸인 것 같다. 천장이 높은 거대한 돔형 건물 내부가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전 세계의 학인(學人)들이 모여 밤늦도록 심원한 학문의 세계에 천착한다. 이곳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거의 백세가 다 된 노부부가 깔끔한 정장을 갖추고 들어와 책을 보는 모습을 보았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와이드너도서관은 하버드대학교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학교 졸업생으로 장서 수집가였던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가 타이타닉호에서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가 350만달러를 기부하여 아들의 이름으로 지은 도서관이다.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시스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년 동안 이 대학에 머물며 연구할 때 중세 문헌부터 현대 문헌까지 내가 찾는 책 중에 없는 게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딱 한 번, 1950년대에 벨기에에서 출판된 책을 청구했지만 책이 유실되어 서고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틀 후 이웃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았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품위 있는 서점 역시 지성의 세계에 필수적인 장소다. 유명한 신화학자 조세프 캠벨이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젊었을 때 무일푼이었던 그는 뉴욕 뒷골목의 수도도 없는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이때 비록 가난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원 없이 했노라고 자부한다. 어느 날 프로베니우스의 책을 읽고 싶었지만 고가의 책을 살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뉴욕의 한 서점에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책을 외상으로 팔 수 없냐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나중에 돈을 벌면 갚으라는 답신과 함께 원하는 책들이 도착했다. 그는 후일 시간강사를 하며 그 돈을 다 갚았다고 한다. 멋있는 이야기다.
예전에 시내에 나가면 종로서적이 있었고 반포에 가면 영풍문고가 있었다. 이제 이런 서점들이 문을 닫았다.
적자를 감당할 수 없는 사정이야 어찌하랴만 진정 아쉬운 일이다.
서점은 사라지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카페와 음식점과 술집이 들어선다.
서울 시민은 이제 배부르고 정신은 혼미하되 지성미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