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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59] 숙제하는 사람, 출제하는 사람

바람아님 2014. 4. 30. 20:25

(출처-조선일보 2012.04.30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2011년 9월 15일 유튜브(YouTube)에 매우 흥미로운 동영상이 올라왔다. 
그 무렵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고 있던 자동차 전시회에서 폴크스바겐 회장이 거기 전시되어 있던 현대 i30에 올라타 호통을 치는 모습을 누가 촬영하여 올린 것이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떠 있는 4분 남짓한 이 동영상에는 그가 부하 직원들에게 i30의 탁월함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직접 줄자를 가지고 여기저기를 재기도 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다. 현대자동차는 단돈 1원도 들이지 않고 엄청난 광고 효과를 얻었다.

이제 우리 숙제는 제법 잘한다. 자동차를 잘 만들어보라는 숙제가 떨어지면 쓸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기술을 다 동원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얹어 국제시장에 내놓고 팔 만한 자동차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못하는 게 있다. 그건 바로 출제이다. 우리가 문제를 내고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숙제를 하며 따라오게 하는 일 말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지만 스티브 잡스가 살아 있을 시절 우리는 늘 허겁지겁 그가 내주는 숙제를 하기 바빴다. 
그가 먼저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그제야 우리 LG와 삼성도 비스름한 걸 꺼내놓고 구시렁거렸다. 
속도는 우리가 더 빠르다는 둥 화면은 우리가 더 선명하다는 둥.

우리는 왜 시장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일까? 잡스가 처음 아이폰을 소개하던 무대를 기억하는가? 
검정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의 곁에는 커다란 이정표 하나가 서 있었다. 자기 아이폰은 과학기술(technology)과 인문학(liberal arts)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아이폰은 분명히 과학기술의 산물인 기계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 속에 들어가 제가끔 무언가를 만들어 
올리며 그들만의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유연히 넘나드는 '통섭형' 인재들이 지금 세상을 주무르고 있다. 
그들이 출제를 하면 그저 성실하기만 한 우리는 밤낮없이 문제풀이에만 열중하며 그 뒤를 따른다.

최근 지식경제부 황창규 R&D 단장의 주도로 '기술인문융합창작소'가 출범했다. 
드디어 우리도 출제하는 사람을 길러낼 수 있을까? 
그곳에 늘 농익은 김치와 상큼한 비빔밥 냄새가 가득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