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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63] 희망의 배

바람아님 2014. 4. 29. 08:58

(출처-조선일보 2014.04.29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사진2011년 새해 벽두 나는 이 칼럼에 '희망을 말하는 동물'이라는 글을 실었다. 그 글에서 나는 '네 개의 촛불'이라는 제목의 파워포인트 내용을 소개했다. 거기에는 설령 우리 삶에서 평화, 믿음, 사랑의 촛불이 죄다 꺼진다 하더라도 희망의 촛불만 꺼지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른 촛불에 새롭게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그래도 명색이 선원인데 승객을 먼저 구하고 맨 마지막으로 탈출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걸 모를 리는 없었으리라. 다만 안전을 무시한 개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딱히 나무랄 순 없지만 화물차 기사들도 모두 살아남았단다. 이미 여러 차례 위험천만의 곡예 항해를 경험한 그들은 애당초 방송을 믿지 않았다. 때마침 갑판에 모여 있던 그들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배를 떠났다. '불신의 세대'는 이렇게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제가끔 살아남았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네 척의 배' 중 세 척을 잃었다. 원칙, 배려, 신뢰의 배는 처참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의 배가 남아 있다. 우리 아이들은 물이 차 들어오는 순간에도 어른들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다. 횡단보도에서는 반드시 손을 치켜들라고 배운 유치원 아이들이 차가 달려오는데도 손을 든 채 길로 내려서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은 이미 '신뢰의 세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원칙은 지키면서도 약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는, 그래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려 노력해왔다. 결과는 너무도 슬프지만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행동에서 나는 희망의 싹을 보았다. 하기야 수학여행 중이었으니 선생님들로부터 단체 행동의 수칙에 대해 얼마나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까? 그들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다만 그 어른들이 선생님이 아니라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못나 빠진 선원들이었던 게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니 제발 포기하지 말자. 이제 막 시작된 신뢰의 세대가 이어질 수 있도록 가르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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