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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95] 강남 좌파

바람아님 2014. 4. 28. 06:27

(출처-조선일보 2012.12.26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강남 좌파’는 역사적으로 늘 있어 왔던 현상이다. 
프랑스에는 고가의 귀족 식품인 러시아산 철갑상어 알(캐비아)을 즐기는 부자면서 민중을 옹호하는 ‘캐비아 좌파(gauche caviar)’가 있다. 
유사한 종류의 사람을 독일에서는 토스카나 지방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뜻으로 ‘토스카너 프락치온(Toskaner Fraktion)’이라 부르고, 
영국에서는 최고급 샴페인을 즐긴다는 의미에서 ‘샴페인 좌파(Champagne Left)’라 부르며, 
미국에서는 부자들의 주거지인 뉴욕의 센트럴파크 인근 5번가에 집중적으로 모여 산다는 의미에서 ‘피프스 애비뉴 리버럴(5th Avenue Liberal)’이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곱지 않다. 
말로는 민중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회의 특권 계급을 비판하지만, 이들 자신이 대단한 자산가로서 특권적인 삶을 누리며 자기 아이들에게 최고급 엘리트 교육을 시키기 십상이다. 
이들의 풍요로운 삶이 민중과 괴리되어 ‘입만 좌파’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들 역시 강남 좌파를 꼭 반기지는 않는다. 
현실 정치의 현장에서 온갖 험한 꼴 다 겪으며 힘겹게 싸우는 정치가들로서는 저 높고 우아한 자리에서 명징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도도하게 비판을 가하는 강남 좌파들이 미워도 ‘너~무’미울 것이다.

그렇지만 ‘캐비어 좌파의 역사’를 쓴 조프랭에 의하면 사실 이들은 역사의 진보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독일에서는 19세기 말 노동자들이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선두에서 새로운 사회적 타협을 모색할 때 토스카너 프락치온이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영국의 샴페인 좌파는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당원들의 편에 섰다. 
피프스 애비뉴 리버럴은 루스벨트·케네디·존슨·클린턴 대통령과 더불어 미국 사회를 혁신한 민주당 출신 의원에게 개혁의 
틀과 사상을 제공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공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명석한 논리와 근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하는 것이 ‘강남 좌파 스타일’이다. 
오히려 이들이 샴페인에 캐비아를 즐기는 부르주아로 굳어지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런 전망도 내놓지 못 하고 콘텐츠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그악스러운 욕만 뱉어내는 극좌파가 주도하는 것이야말로 
비극적 코미디가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