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5. 3. 3. 00:55
[트럼프·젤렌스키 회담] 트럼프·젤렌스키 회담 파국에 재조명 받는 70년 전 韓美 회담
1954년 7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지난 28일의 트럼프·젤렌스키 회담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이젠하워는 중간에 일어나 회담장을 나가 버렸고, 그가 돌아오자 이번엔 이승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해 1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식 발효에 성공했고, 미국에 8억달러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이승만은 7월 26일 워싱턴 내셔널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독설을 쏟아냈다.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 세력의 위세만 과시해 줬다.” 30일 2차 정상회담을 1시간 앞두고 미국 측이 내놓은 공동성명서 초안에 한일 국교 정상화 관련 내용이 들어있는 것을 본 이승만은 대노했다. “이러면 만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움직이려 하지 않자 미국 측은 당황했다. 결국 정상회담은 6~7분 정도 늦게 시작됐다.
https://v.daum.net/v/20250303005554939
한국은 더한 수모도 겪었다… 회담장 박차고 나간 美에 결실 얻어내
한국은 더한 수모도 겪었다… 회담장 박차고 나간 美에 결실 얻어내
1954년 7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지난 28일의 트럼프·젤렌스키 회담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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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카터는 ‘미군 철수’ 놓고 150분 설전
조선일보 2025. 3. 3. 00:55
[트럼프·젤렌스키 회담]
1979년 6월 서울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양국 정상회담사에서 보기 드물게 험악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당시 두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두고 얼굴을 붉히며 거친 설전을 벌였다. 카터 대통령이 훗날 “동맹국 지도자와 벌인 토론 가운데 가장 불쾌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기밀 해제된 미 외교 문서를 보면, 1979년 6월 29일 카터 대통령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한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입국 하루 만인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양 정상의 모두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긴장감 있게 진행됐다.
포문은 박 대통령이 먼저 열었다.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정책으로 북한의 군사력이 더 증강됐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것이다. 카터 대통령은 “검토 중인 주한 미군 감축 규모는 전체 한국군의 0.5% 수준에 불과하다”고 맞받았다.
회담에 배석한 박동진 전 외무장관은 자서전에서 “카터 대통령이 계속 (미군) 철수 압박을 넣었다”면서 “하지만 박 대통령은 ‘주한 미군을 영원히 두자는 게 아니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라면서 반대 논리를 폈다”고 말했다. 한미 정상의 설전은 2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https://v.daum.net/v/20250303005549937
박정희·카터는 ‘미군 철수’ 놓고 150분 설전
박정희·카터는 ‘미군 철수’ 놓고 150분 설전
1979년 6월 서울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양국 정상회담사에서 보기 드물게 험악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당시 두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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