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넘치면 기운다

바람아님 2014. 10. 5. 09:48
중국에 ‘기기’란 물건이 있다. ‘기울어지는 그릇’이란 뜻인데, 고래로 중국 황제들의 곁을 늘 지켰다 한다. 똑바로 서지도 못하는 그릇을 끼고 산 이유가 뭘까.

 여러 변종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잔 양쪽에 줄을 달아 두 개의 기둥에 각각 묶은 형태다. 그런데 이게 참 신기하다. 잔에 물을 가득 부으면 뒤집어지고 적게 부으면 기울어지며 딱 절반을 채워야 똑바로 선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황제들이 스스로 과욕과 지나침이 없기를 경계한 것이다.

 ‘계영배(戒盈杯)’도 같은 의미다. 밑바닥에 구멍이 있는 술잔이다. 적당히 따라야지 70% 이상 채우면 술이 다 새나간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원래 고대 중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기였다. 과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매사에 지나침을 삼가게 해달라는 서원을 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조선시대 권력기관들은 각기 독특한 술잔을 가졌었다. 왕명을 받드는 승정원 관리들은 ‘갈호배(蝎虎杯)’란 걸로 술을 마셨다. 갈호는 사막에 사는 도마뱀의 일종인데 술 냄새만 맡아도 죽는다는 전설이 있단다. 일부러 술잔을 갈호 모양으로 만들어 과음을 자기 단속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게 이들 기기요, 계영배요, 갈호배 같다. 술도 술이지만, 만사에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들만 득실대는 까닭이다. 대통령은 밀어붙이는 뚝심은 넘치는데 설득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여당은 기득권 의지는 넘치는데 양보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야당은 계파 간 주도권 욕심은 넘치는데 힘 합칠 의지는 박약하다. 그래서 정치는 새고 갈등만 끓는다.

 세월호 유족대표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넘치는 잔으로 술을 마시다 실수했지만, 이미 앞서 더 큰 실수를 범했다. 가슴 아리고 안타까워 말 못하는 국민들 앞에서 자기 주장만 고집하다 절반의 외면을 받았다. 켜켜이 쌓인 이 사회 적폐를 바로잡을 골든타임이 줄줄 새는데 증오와 분노만 부어 채웠다.

 모자라도 그렇지만 지나쳐선 얻을 게 없다. 오히려 잃는다. 대통령은 민심을 잃고 여당은 정의를 잃으며, 야당은 명분을 잃고 유족들은 공감을 잃는다. 공자는 주나라 종묘에서 말로만 듣던 기기를 보곤 직접 실험을 해봤다. 그가 말한 중용과 과유불급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탄식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오호라, 세상에 넘쳐서 기울지 않는 법이 어디 있으랴.”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탄식이다.

이훈범 국제부장/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