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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글 논문 천대하면 문화 선진국 못 된다

바람아님 2014. 10. 7. 09:11

(출처-조선일보 2014.10.07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한국인문학총연합회 회장)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한국인문학총연합회 회장
영어가 수(數)를 세는 데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어서 미국 학생들의 수학적 능력이 아시아권 국가보다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얼마 전 발표되었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사고는 인간 삶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다
언어는 인간의 모든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글이 창제된 지 500년이 넘었다고 해도 한글이 시장과 지성의 영역을 아우르게 된 것은 광복 이후 
한글 교육을 받은 세대의 등장과 함께였다. 문화가 깊이와 품격을 가지려면 다양한 언어 실험과 
개념 놀이가 필요하고 다층적 차원의 언어 실천이 필요하다. 
추상적 언어 놀이의 최상급은 학문 세계에 존재한다. 언뜻 보기에 두꺼운 개념의 갑옷을 입은 전문가 
용어들로 가득 찬 것같이 보이지만 이런 글쓰기와 사유가 없다면 한글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문화는 
쉽고 값싼 일차원성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 대학들마다 영어 논문을 써서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라는 요구가 가중되고 있다. 
소위 SCI급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에 대해서는 국내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보다 최고 5배까지 점수를 주겠다는 대학도 있다. 
정년 보장을 받아야 하는 젊고 유능한 교수들이 한글 논문 쓰기를 포기하고 영어 논문 쓰기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정교하고 지적인 사고를 연마하는 대학 강의도 모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하라는 요구가 빈번하다.

학술지는 학문 생태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어 학술지는 영어 해독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읽히고 유통된다. 영어의 사용에는 영어를 사유와 삶의 언어로 삼는 문화 
전체가 개입되어 있다. 학문의 의제 설정, 가치관과 전통에 입각하여 갖게 되는 지적 호기심뿐 아니라 글쓰기의 규범, 
글의 논리를 영어 문화권에 따라야 한다. 그래야 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영어로 말하고 글 쓰는 일은 영어 문화권을 풍요롭게 하고 그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일이다. 
한국의 인문사회학자들이 학문적 삶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그렇게 보낸다고 할 경우 한글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일상적이고 쉬운 이야기는 한글로 하고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이야기들은 영어로 해야 소통이 되는 
그런 사회가 될까 두렵다. 벌써 많은 분야의 전문 용어들은 영어 일색이고, 일부 과학자들은 영어로 해야 정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우리가 진정 학문의 차원에서 선진국이 되고 문화 선진국이 되려면 국내 학문 생태계가 튼튼해져야 한다. 
학술지 지원에 쏟는 노력이 헛되이 끝나지 않으려면 국내 학술지와 한글 논문 작업을 하찮게 여기는 풍토를 개선해야 한다. 
대학 재정 지원 사업과 연구비 지원 사업의 평가 시스템이 학문 방향을 왜곡시키고 미래 세대의 삶의 방향까지 왜곡하는 
일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국내 학술지의 논문과 국제 학술지의 영어 논문을 양적인 차원에서 차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물론 국내 학술지의 수준을 높이는 일과 병행되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학문 또는 학술 정책이 지니는 많은 함의가 충분히 토론되고 검토되어 문제를 제대로 풀어야 우리의 학술과 문화가 
한 단계 비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