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2.04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이 '유자광전(柳子光傳)'을 지었다. 글이 대단했다.
사화(士禍)를 서술한 대목이 특히 압권이었다.
어떤 사람이 끝에 시 한 구절을 써 놓았다.
"마침내 속내가 그 누구와 비슷하니, 그 자신이 전기 속의 사람인 줄 몰랐네
(畢竟肺肝誰得似, 不知身作傳中人)."
자기가 자기 얘기를 쓴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의 죄상을 신랄하게 논했다.
또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의 죄상을 신랄하게 논했다.
사람들이 초상화의 찬문(贊文) 같다고 했다.
결국 그는 장살(杖殺) 당해 죽었고 죄상을 논한 사람은 수십 년 부귀를 누렸다.
뒤에 보니 죄를 논한 사람의 행적이 앞서 죽은 사람보다 훨씬 심했다.
사람들이 또 말했다.
"이것은 남의 화상찬이 아니라 제 화상찬을 쓴 게로군."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자저실기(自著實紀)'에 나온다.
심노숭의 이 책에는 정조 서거 이후 노론 벽파(僻派)와 시파(時派) 간 권력 투쟁 장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심노숭의 이 책에는 정조 서거 이후 노론 벽파(僻派)와 시파(時派) 간 권력 투쟁 장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명분과 시비를 들고 싸웠지만 실상은 이전투구의 사생결단만 있었다.
당시 각 당파의 영수급 인물들은 부득이 한자리에 앉게 될 때면 서로 얼굴을 안 보려고 중간에 병풍을 치기까지 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 결국은 제 말 하기의 행태는 반복됐다.
기회만 있으면 상대를 비방하고 헐뜯어 치명타를 안기기 위해 부심했다.
책 속의 한마디.
책 속의 한마디.
"이것이 세상 도리의 진퇴(進退)나 저들 무리의 득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결과적으로는 그저 사람을 마구 죽였다는 헛된 명성만 널리 얻고 애초에 긴요한 실제 이익은 없었다.
저들 또한 어찌 이를 모를까마는 사방을 둘러봐도 손 쓸 데가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노루 잡던 몽둥이를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천하에 가소로운 일이다."
타장지정(打獐之梃), 즉 노루 잡던 몽둥이는 속담에 '노루 잡던 몽둥이 삼년 우린다'는 말에서 끌어왔다.
타장지정(打獐之梃), 즉 노루 잡던 몽둥이는 속담에 '노루 잡던 몽둥이 삼년 우린다'는 말에서 끌어왔다.
옛 속담집 '동언해(東言解)'를 보니
"한때 어쩌다 얻고는 매번 요행을 바란다(一時偶獲, 每冀僥)"라고 뜻을 매겨 놓았다.
운 좋게 노루를 잡더니 그 후 재미를 붙여 툭하면 몽둥이 들고 노루 잡겠다고 설친다는 말이다.
어째 세상은 변할 줄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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