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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64] 손자 손녀가 없는 노년

조선일보 2022. 06. 01. 03:04 “만약에 우리한테 아이가 있었다면 말이에요. 재롱을 피우고 우리를 사랑해주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자식이 있었다면 말이죠. 우리의 늘그막이 얼마나 빛났을까요. 예쁜 장난감과 사탕을 준비하고, 트리에 불을 밝히고,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볼 때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크리스마스가 되었을까요.” - 힐데가르드 호손 ‘어느새’ 중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태어날 아이에게 못 할 짓’이라며 낳지 않는 부부가 많다. 2021년 우리나라 출산율은 198국 중 2년 연속 꼴찌다. 2060년이면 65세 이상 노령 인구가 국민의 절반을 넘..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62] 성범죄에 관대한 법과 정치

조선일보 2022. 05. 18. 03:06 방에 들어온 레몽양은 상관이 그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역겨운 듯한, 그렇지만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냐하면 앞에 서자마자 재빠른 동작으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엉덩이를 홱 돌렸지만, 라부르댕은 이 분야에는 거의 예지력에 가까운 직감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피하든 간에 그는 항상 목적을 달성했다. - 피에르 르메트르 ‘오르부아르’ 중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성 추문이 또 터졌다. 오죽하면 ‘더듬어 만진 당’이라 할까. 여성 보좌진이 피해를 신고했고 당이 사건을 조사한 뒤 박완주를 제명 처리했다. 그는 전 서울시장 박원순, 전 부산시장 오거돈, 전 충남지사 안희정 등의 성범죄와 관련..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60] 국민의 뜻이라는 입법 독재

조선일보 2022. 05. 04. 03:01 “당신이 보고서를 썼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너잖아!” 다른 피고인이 손가락으로 한나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내가 쓰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보고서에 쓰인 필체와 한나의 필체를 비교해보자고 제안했다. “내 필체라고요?” 한나는 더욱더 불안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전문가까지 부를 필요 없습니다. 내가 그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 -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얼마 전 대통령 당선인 진영은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논란을 국민투표로 끝내자고 제안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법적으로 불가하다고 했고, 여당은 국민투표란 히틀러가 좋아할 일이라며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부터 물어보라고 비아냥댔다. 이에..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59] 보험 살인과 검수완박

조선일보 2022. 04. 27. 03:04 계산적인 범죄가 자신의 본모습을 잃었을 때, 온전한 인격과 완벽히 합치하지 않을 때 저질러진다고 가정하는 것만큼 큰 실수는 없다. 본디 흉악한 자가 살인을 저지른다. 대담하고도 뻔뻔하게 저지른다. 악명 높은 범죄자가 양심에 비추어보면서 흉악한 범죄를 담대하게 저질렀다면 놀랄 일이다. 범죄를 양심에 비춰볼 수 있다면, 혹은 비춰볼 양심이라도 있다면 범죄를 저지르겠는가? -찰스 디킨스 ‘생명보험 사기 사건’ 중에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자마자 젊은 아내는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들고 게임을 했다. 남편이 죽은 지 한 달, 그녀는 연인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녔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남편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 수는 있다. 남편 앞으로 들었던 보험금을 타서 애인과..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58] 마기꾼, 마실감, 마르소나

조선일보 2022. 04. 20. 03:01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새로웠으며 그 새로움 때문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쾌했다. 몸이 더 젊고 더 가볍고 더 행복해진 느낌이었다. 그 안에 통제할 수 없이 무모해진 내가 있었다.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마구 얽힌 채 머릿속을 급류처럼 흘러갔다. 의무감은 녹아내렸으며, 영혼은 낯설고 순수하지 않은 자유를 갈구했다. 마치 와인을 마실 때처럼 나는 쾌감을 느꼈다. - 로버트 스티븐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중에서 거리 두기가 해제되었지만 마스크 쓰기는 계속된다. 사실 한적한 실외에서 마스크가 의무였던 적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산한 등산로나 산책길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고 혼자 조깅하면서도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마스크 쓰고 꽃놀이 데이트를 하고 마스크 씌운..

작은 기쁨을 온전히 즐기는 일[내가 만난 名문장/이안리]

동아일보 2022. 04. 18. 03:03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중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책에 실린 단편을 다시 읽었다. 제목은 ‘작은 기쁨’. 깨끗한 문장에 여러 번 연하게 밑줄을 그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매번 새로운 문장을 만난다. 나는 사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문장을 좋아하고, 그런 문장은 내가 가진 책 가운데 올리브 키터리지에 가장 많다. 문장을 옮겨 적다가 ‘소확행..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57] 절대 반지 그리고 송곳과 채칼

조선일보 2022. 04. 13. 03:03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반지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완전히 압도당하게 된다네. 반지가 사람을 소유하게 되는 셈이지. 결국에는 반지를 지배하는 암흑의 권능이 감시하는 미명의 지대를 헤매게 된다네. 의지력이 강하거나 원래 선량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이 다소 지연될 수도 있겠지만, 의지력이나 선량함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일세. 결국엔 암흑의 권능에 사로잡히고 마는 거지. - J.R.R. 톨킨 ‘반지의 제왕’ 중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민의 대학, 의전원 경력이 삭제됐다. 입학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후속 조치다. 의사 면허도 취소 절차에 들어갔다. 조국은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고 채칼로 살갗을 벗겨내는 것 같은 고통’이라며..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56] 죽음의 홍수, 누가 책임지나?

조선일보 2022. 04. 06. 03:01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어쩌면 나 아닐까? 남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아침 내가 침대에 틀어박혀 골몰했던 생각도 그런 것이었다. 머리와 발치에 구리 창살이 있는 이 침대는 나의 임종 침상이 되리라. 나는 죽음보다는 장례식을 상상한다. 그 편이 기분이 좀 낫다. 적어도 고인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이미 지나고 난 후다. - 베로니크 뒤 뷔르 ‘체리토마토파이’ 중에서 코로나 때문에 사망자가 급증, 화장터와 시신 보관 냉장 시설이 포화 상태다. 식품 냉동 탑차나 정육 보관용 냉동 창고를 이용하는 장례업체도 있다고 한다. 죽음의 밀물이 정점을 찍을 때 명이 다하면 고기를 보관하던 냉동실에서 다른 망자들과 섞여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