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15-5-13
"조선은 영락(명나라 성조의 연호) 연간 이후로 해마다 황제·황태자 생일과 설날에 사신을 파견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진상했으며, 이 밖에 경축하고 위로하며 사은하는 것은 수시로 했다. … 조선이 세시(歲時)에 조공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공손하고 삼갔다." 조선 후기 학자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의 한 구절이다. 조공은 19세기까지 대중 관계의 상징이었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운영 원리였다.
우리나라가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조공은 공식 외교행위이자 대중 교역·교류의 기회였다. 주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았다. 중국은 제국 운영비용으로 여겼다. 조공 횟수로 중국 인접국들의 지위가 갈리던 시절이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항저우 태수 시절에 "백성들이 영접 준비로 심한 고통을 당한다"며 고려 사신 입국에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왔지만, 일본군을 따라온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음에도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박완규 논설위원 예전의 한·중 관계를 돌아본 것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때문이다. 중국이 주도하는 AIIB 출범을 놓고 말도 많았지만 어느새 구색을 갖추고 있다. 57개 창립 회원국들이 다음주 협정문 협상을 마무리하고 내달 서명식을 연 뒤 국내 비준 절차를 매듭지으면 연말에 AIIB가 공식 출범한다.
AIIB 출범은 우리 외교에 중요한 전환점이다. 우리나라는 가입을 종용하는 중국과 반대하는 미국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다가 막판에 가입을 결정했다. 눈치 보기로 일관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최근 미국 방문 기간에 파격적 환대와 일방적 편들기를 누렸지만, 이제 뒤늦게 참가를 저울질하고 있다. AIIB 설립 취지를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가입은 불가피했다.
AIIB는 그만큼 중요한 기구다. 미국 이외의 국가가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는 처음이어서 세계 금융계 판도를 흔들 것이다. 우리나라는 AIIB 지분율이 3%대로 예상되지만, 중국·인도·러시아와 함께 주요 회원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 중국은 다자체제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어 우리나라의 발언권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중요한 것은 AIIB의 청사진이다. AIIB는 인프라 투자를 통한 아시아 저개발국 경제발전 지원에 목적을 둔다. 중국의 야심찬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과 맞물려 세계 물류지도를 다시 그린다. 중국이 AIIB 출범 계획을 발표할 때는 초기 자본금을 500억달러로 예상했지만, 참여국이 급증함에 따라 1000억달러로 늘린다는 말이 나온다. 활동영역이 넓어질 것이다.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아시아 인프라 투자 수요가 2020년까지 연간 8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국내 기업이 아시아 각지의 인프라 구축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북한 인프라 투자와 남북한-대륙철도 연결 등 다양한 북한 관련 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다. 남북 관계의 새 장을 열면서 북한 개혁·개방을 이끌어내는 지렛대로 쓸 수 있다.
우리 외교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지금 한·미, 한·일 관계의 이상 징후로 외교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그렇다고 여기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한·미 동맹은 변수가 아닌 상수이고, 한·일 관계는 과거사 문제에 발목이 잡혔지만 더 나빠지기도 어렵다. 외교 노력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 외교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당한다는 데 있다. 분단국에는 위태로운 줄타기가 아닐 수 없다. 양자택일의 틀에서 속히 벗어나야 외교가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AIIB 출범은 소중한 기회다. 우리 외교가 연전연패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고, 나아가 창의적인 외교 노력이 수반되면 양자택일 외교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지금의 문제의식을 토대 삼아 미래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치밀한 외교 준비는 필수다. 기회를 더 크게 여는 데 집중해야 한다.
박완규 논설위원
우리나라가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조공은 공식 외교행위이자 대중 교역·교류의 기회였다. 주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았다. 중국은 제국 운영비용으로 여겼다. 조공 횟수로 중국 인접국들의 지위가 갈리던 시절이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항저우 태수 시절에 "백성들이 영접 준비로 심한 고통을 당한다"며 고려 사신 입국에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왔지만, 일본군을 따라온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음에도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AIIB 출범은 우리 외교에 중요한 전환점이다. 우리나라는 가입을 종용하는 중국과 반대하는 미국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다가 막판에 가입을 결정했다. 눈치 보기로 일관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최근 미국 방문 기간에 파격적 환대와 일방적 편들기를 누렸지만, 이제 뒤늦게 참가를 저울질하고 있다. AIIB 설립 취지를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가입은 불가피했다.
AIIB는 그만큼 중요한 기구다. 미국 이외의 국가가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는 처음이어서 세계 금융계 판도를 흔들 것이다. 우리나라는 AIIB 지분율이 3%대로 예상되지만, 중국·인도·러시아와 함께 주요 회원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 중국은 다자체제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어 우리나라의 발언권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중요한 것은 AIIB의 청사진이다. AIIB는 인프라 투자를 통한 아시아 저개발국 경제발전 지원에 목적을 둔다. 중국의 야심찬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과 맞물려 세계 물류지도를 다시 그린다. 중국이 AIIB 출범 계획을 발표할 때는 초기 자본금을 500억달러로 예상했지만, 참여국이 급증함에 따라 1000억달러로 늘린다는 말이 나온다. 활동영역이 넓어질 것이다.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아시아 인프라 투자 수요가 2020년까지 연간 8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국내 기업이 아시아 각지의 인프라 구축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북한 인프라 투자와 남북한-대륙철도 연결 등 다양한 북한 관련 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다. 남북 관계의 새 장을 열면서 북한 개혁·개방을 이끌어내는 지렛대로 쓸 수 있다.
우리 외교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지금 한·미, 한·일 관계의 이상 징후로 외교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그렇다고 여기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한·미 동맹은 변수가 아닌 상수이고, 한·일 관계는 과거사 문제에 발목이 잡혔지만 더 나빠지기도 어렵다. 외교 노력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 외교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당한다는 데 있다. 분단국에는 위태로운 줄타기가 아닐 수 없다. 양자택일의 틀에서 속히 벗어나야 외교가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AIIB 출범은 소중한 기회다. 우리 외교가 연전연패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고, 나아가 창의적인 외교 노력이 수반되면 양자택일 외교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지금의 문제의식을 토대 삼아 미래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치밀한 외교 준비는 필수다. 기회를 더 크게 여는 데 집중해야 한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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