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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종횡무진 인문학] 단군신화의 웅녀, 왜 역사책마다 다른 인물이 되었나

바람아님 2015. 5. 23. 13:28

(출처-조선일보 2015.05.23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가와다 준조 '무문자 사회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이것을 먹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사람이 된 곰은 환웅과 결혼해서 단군을 낳았다.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진 단군신화 내용이다. 
그런데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이 단군신화와는 다른 내용의 단군신화가 
비슷한 시기 이승휴가 집필한 '제왕운기'에 전한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까지는 같으나 여기에는 웅녀로 생각되는 손녀(孫女)가 약을 먹고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개 문헌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이 
왜 서로 다른가? 이승휴가 '역사 왜곡'을 한 것일까? 어떤 학자는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다는 신화를 유학자 이승휴가 합리적으로 수정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처럼 서로 다른 버전의 단군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단군신화가 원나라 간섭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모시족(族)을 조사한 일본의 인류학자 가와다 준조는 
'무문자(無文) 사회의 역사'(논형)에서 프랑스 식민지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채록된 이 지역의 왕조 기원 신화에 등장하는 역대 왕들의 계보가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왕조 기원 신화를 채록하던 각각의 시점에 정치적으로 
유력했던 집단이 중시한 왕통과 그 업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무문자 사회의 역사'

무문자(無文) 사회(社會)의 역사

 저자-가와다 준조 | 역자-임경택 | 논형 |2004.06.28

 원제 無文字社會の歷史 : 西アフリカ·モシ族の事例を中心に



고려시대 후기에 서로 다른 버전의 단군신화가 존재했다는 사실 역시 삼국시대에 

서로 다른 정치적 성격을 띤 집단이 각기 믿고 있던 왕조 기원 신화를 독립적으로 기록했고, 
이를 일연과 이승휴가 충실히 계승한 결과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단군신화가 고려시대 후기에 갑자기 만들어졌다면 이런 현상은 나타날 수 없었을 터이다. 
이처럼 서아프리카와 유라시아 동해안의 끝에서 제국주의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받은 모시족과 
한민족은 의외의 부분에서 문화 현상을 공유하고 있다. 
한때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인류학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 위에서 집필된 
이 책은 현대 한국인의 뇌리에 존재하는 여러 편견을 일거에 깨뜨려줄 터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일화 한 가지. 모시족 왕들의 계보가 낭송된다는 소식을 들은 저자가 궁궐 앞으로 
갔다. 이윽고 이야기꾼이 나타나서 북을 치기 시작했는데, 언제까지 기다려도 계보를 읊을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40분이 흐른 뒤 이야기꾼은 "녹음은 잘 했겠죠?"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소리가 왕들의 계보 그 자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