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08-10
북방고고학 전문가 강인욱 경희대 교수
‘북방기원설’ 등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수천 km 떨어진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 고분’과 흡사한 점, 신라 금관총에서 1921년 출토된 화려한 금관이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틸리아 테페’ 금관과 유사한 점 등을 근거로 한때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한민족 북방기원설은 한국인이 예부터 외래문화에 절대 의존했다는 일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 학자가 내놓은 기마민족설 역시 만주를 경영하던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흉노족이 내려와 신라 지배층을 형성했다는 일부 학설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방기원설 등이 일본 식민사학에서 비롯됐다는 이유로 ‘한반도 자생설’을 주장하는 것 역시 극단에 치우쳤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북방 초원문화의 영향을 부정하는 것은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리겠다고 욕조 안의 아기까지 내버리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신라 적석목관분에서 계림로 보검을 비롯해 금동 신발, 봉수형 유리병 등 수많은 초원계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 사실을 자생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 고대문명이 자생적이면서도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특히 신라인들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초원문화를 적극 흡수해 자신들만의 황금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일본 고고학계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강 교수는 국내 유라시아 고고학 연구가 일본 측 연구 성과에 편향돼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의 영토여서 접근이 어렵고 사료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냉전이 끝났으니 이젠 일본뿐만 아니라 러시아나 중국 측 사료도 폭넓게 다뤄야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김상운 기자
중국 랴오닝 성 다롄 시에 있는 고조선의 청동기 시대 유적인 ‘쌍타자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강인욱 교수. 강인욱 교수 제공
“북방 초원 민족이 떼 지어 한반도로 이동한 뒤 지배층이 교체됐다는 한민족 북방기원설이나 한반도 고대문명이 유라시아 초원 문명과 상관없이 자생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 모두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는 최근 발간한 ‘유라시아 역사 기행’(민음사·사진)에서 ‘북방기원설 혹은 기마민족설’이나 ‘한반도 자생설’을 모두 비판했다. 강 교수는 국내 고고학계에서 드물게 러시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북방 고고학 전문가다.
‘북방기원설’ 등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수천 km 떨어진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 고분’과 흡사한 점, 신라 금관총에서 1921년 출토된 화려한 금관이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틸리아 테페’ 금관과 유사한 점 등을 근거로 한때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한민족 북방기원설은 한국인이 예부터 외래문화에 절대 의존했다는 일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 학자가 내놓은 기마민족설 역시 만주를 경영하던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흉노족이 내려와 신라 지배층을 형성했다는 일부 학설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방기원설 등이 일본 식민사학에서 비롯됐다는 이유로 ‘한반도 자생설’을 주장하는 것 역시 극단에 치우쳤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북방 초원문화의 영향을 부정하는 것은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리겠다고 욕조 안의 아기까지 내버리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신라 적석목관분에서 계림로 보검을 비롯해 금동 신발, 봉수형 유리병 등 수많은 초원계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 사실을 자생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 고대문명이 자생적이면서도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특히 신라인들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초원문화를 적극 흡수해 자신들만의 황금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일본 고고학계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강 교수는 국내 유라시아 고고학 연구가 일본 측 연구 성과에 편향돼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의 영토여서 접근이 어렵고 사료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냉전이 끝났으니 이젠 일본뿐만 아니라 러시아나 중국 측 사료도 폭넓게 다뤄야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김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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