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05
이 의원이 교육부 산하 동북아역사재단 등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외교부의 의뢰를 받은 재단은 2012년 8월 미 의회조사국(CRS)에 ‘한·중 경계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한국의 시각’이란 검토자료를 제출했다.
하지만 자료엔 동북공정(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역사를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프로젝트)을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고 이 의원은 전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기구인데, 오히려 국내 학계의 시각과는 다른 부분이 담겼다는 게 이 의원의 지적이다.
당시 미 상원외교위원회는 북한 급변 상황 시 중국의 개입 가능성 등을 분석하기 위한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적 입장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정재정 당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미국에 가서 CRS 관계자를 만나 한국 입장을 담은 자료를 전달했다.
그러나 자료와 지도 곳곳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 의원에 따르면 우선 고조선의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가 현재의 랴오닝(遼寧)성 일부로 경계를 한정했다. 실제 고조선의 영토는 이보다 훨씬 북동쪽인 남만주 일대 및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 연해주까지 이르렀다. 또 고조선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2333년인데, 이에 대한 설명 없이 지도엔 “기원전 3세기 무렵의 고조선 영토”라고만 돼 있었다.
기원전 108년 중국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진번·낙랑·임둔·현도)이 과거 한반도 일부 지역을 통치했다는 것이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적 주장인데 이를 인정하는 듯한 지도도 보냈다. 기원전 3세기와 196년 황해도 부근에 진번군이 있었던 것처럼 표시해놨다. 기원전 108년 지도엔 아예 한사군 네 곳을 한반도 북부 지역에 표시해놨다.
기원전 37년 건국한 고구려를 기원전 196년 지도에 등장시키면서 고구려 국명 옆에 ‘고구려현’이라는 한나라의 지역명을 표기하기도 했다. 이 밖에 서기 676년 지도에 신라와 당나라의 영역을 표기하면서 독도는 그리지 않았다.
인하대 복기대(융합고고학) 교수는 “지도대로라면 고려의 수도 개성에 낙랑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런 사료나 학설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제시대 때 식민사학자들이 ‘한국은 다른 나라의 속국’이라고 날조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 의회는 이를 ‘한국 정부의 입장’으로 그대로 첨부해 2012년 12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과 상원의 과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의원은 “미 의회 보고서는 미국의 정책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자료인데 그런 자료에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지도를 재단과 정부가 보낸 것은 국익을 훼손하는 행동”이라며 “잘못된 부분들을 빨리 수정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단은 2008년부터 46억원을 들여 만든 ‘동북아 역사지도’의 신라시대 부분에 독도를 누락하는 등 일제 식민사관 등을 드러내 역사왜곡 논란을 일으켰다.
정재정 당시 이사장도 논란 속에 2012년 9월 물러났 다. 하지만 이미 문제 자료가 미 의회로 건너간 상태였다. 재단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일제 식민사관 등을 계승하고 있는 이들이 내부에 있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노트북을 열며] 동북아역사재단은 왜 만들었나
[중앙일보] 입력 2015.10.05
출범 당시 국민과 정치권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0년째를 맞으면서 조직의 활력이 떨어지고 연구가 타성에 젖었다는 비판이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일침을 가할 치열한 대응 논리 개발이 미흡하다는 학계의 질타는 뼈아프다. 예컨대 고조선의 활동 무대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발굴된 훙산(紅山)문화를 중국이 ‘중화문명탐원(探源)공정’ 차원에서 중국사로 편입 중인데도 사실상 방치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주장을 통렬하게 반박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사대주의사관(史觀)과 식민사관은 가장 배척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 아닌가.
오죽하면 재야 사학자들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재단이 식민사관의 본거지”라고 직격탄을 날렸을까.
재단 내부에서도 자성론이 들린다. 한 연구원은 “설립 취지에 맞게 일하기에는 조직 구성과 인사에 문제가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는 지난달 17일 김호섭(61)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를 임기 3년의 제4대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정치학회장과 현대일본학회장을 역임한 정치학자다. 이번에 물러난 김학준 전 이사장이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시절에 가르친 제자란 인연도 있다.
한 역사학자는 “역사재단 이사장을 역사학자만 맡으란 법은 없지만 청와대의 유능한 역사학자 발굴 노력이 미흡했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김호섭 이사장은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부족하지만 많이 노력하겠다”고 자세를 낮췄다.
외교부는 한·중 관계가 요즘 어느 때보다 좋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 도발은 장기적 전략에 따라 추진되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지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청와대는 한·일 관계 개선 분위기를 감안해 온건파 정치학자를 역사재단 이사장에 앉혔는지는 몰라도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역사왜곡에 맞대응하라고 만든 재단이 양국 관계의 일시적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휘둘리면 안 된다. 항상 최악의 역사 갈등 상황에 대비해 치열하게 연구하고 비장의 반격 카드를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5일 열리는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이 묻지 않더라도 재단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장세정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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