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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수백척이 마중나와… 밤에 도착땐 항구 전체가 불야성

바람아님 2015. 11. 26. 01:12

동아일보 2015-11-25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2부 조선통신사의 길]<6>시모노세키


조선통신사가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첫발을 내디딘 항구 지점에 세워진 조선통신사상륙기념비. 2001년 당시 한일의원연맹 한국 측 회장을 맡았던 김종필 자민당 명예총재의 친필로 새겨졌다.
일본 도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혼슈 서쪽 최남단 항구 도시 시모노세키(下關)는 조선시대 전 기간(임진왜란 이후 12회) 17회 파견된 통신사 중 16회 통신사가 모두 발을 디딘 한일우호의 관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아픔과 슬픔의 관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 물자를 한반도로 옮기는 침략거점이었으며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청나라와 1895년 4월 17일 한국 병탄의 첫걸음이 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절에는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고 많은 강제징용 조선인들이 건너갔다. 행정구역상 일본 주고쿠(中國) 지방 야마구치(山口) 현에 속한 이곳은 아베 신조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하다.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된 아미다지 터에 자리 잡은 아카마 신궁에는 1711년 부사로 이곳에 들렀던 임수간의 시문이 액자에 담겨 보존돼 있다. 시모노세키=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 조선통신사 마중

부산을 출발한 통신사는 시모노세키에 닿기까지 세 개의 큰 바다를 넘어야 했다. 부산에서 대마도(쓰시마 섬)까지, 대마도에서 아이노시마 그리고 다시 아이노시마에서 시모노세키에 이르는 바다이다. 통신사들은 시모노세키에 들어서면 파도가 잔잔해지는 세토나이카이 내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일단 큰 고비를 넘긴 셈이 되었다. 일행들은 이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고 한다. 숙소는 아미다지와 인조지 두 사찰이었다.

1763년 통신사 일행의 우두머리격인 정사로 파견됐던 조엄은 ‘해사일기(海사日記)’에서 화려했던 시모노세키 풍경이 당시 조선보다 나았다고 전한다.

‘관소(숙소)에 이르기까지 왼편 해안에 민가가 서로 잇대어 있고 사방의 장삿배가 모두 모여들어 용산이나 마포 같다. 집들이 화려하고 화초가 우거진 것은 한층 훌륭하니 좋은 강산이라고 할 만하다.’

오랜 항로에 지쳤을 통신사 일행들을 이곳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맞았다. 통신사를 안내하던 100여 척의 일본 배에는 화려한 빨강 파란 채색 깃발을 단 호위선까지 따라붙었는데 해가 진 후 도착할 경우에는 항구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는 장관을 연출했다고 한다. 1682년 통신사 일행으로 이곳에 도착한 역관 김지남은 당시 풍경을 ‘동사일록(東사日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마중 나온 왜선들이 수백 척인데 전후좌우에서 일시에 등불을 켜고 멀리 바다 가운데를 덮고 있다. 그 찬란하기가 많은 별들을 뿌려놓은 것 같은데, 배에 가까워지자 환하기가 대낮 등불을 보는 것 같다….’ 통신사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일본인들은 바닷물에 나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판자를 덮은 간이 선착장을 만들어 이들을 환대했다.


○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

통신사가 첫발을 내디딘 지점은 현재의 아카마 신궁 앞 항구 터이다. 취재진이 후쿠오카에서 고속열차(신칸센)를 타고 1시간 반 만에 이곳에 도착한 9월 17일은 쾌청한 가을 날씨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조선통신사상륙기념비였다. 연회색 돌비석 위에 ‘朝鮮通信使 上陸 淹留之地(조선통신사 상륙 엄류지지)’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는데 ‘통신사가 도착해 오랫동안 머물렀던 땅’이라는 뜻이다. 한일의원연맹 한국 측 회장을 맡았던 김종필 자민당 명예총재의 친필이었다.

취재에 동행한 서학규 재일대한민국 민단 야마구치 현 지방본부 사무국장은 “2001년 8월 비석 제막식에 일본 측 초청을 받은 김 총재와 지금 총리가 된 아베 당시 관방장관 등 양국 관계자 70여 명이 참가했다”고 전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김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일 양국의 협력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본이 역사인식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며 ‘돌직구’를 던졌다고 한다. 아베 당시 장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카마 신궁은 통신사들이 묵었던 사찰 아미다지가 있던 곳이었다. 1718년 아미다지에 묵었던 신유한은 당시 숙소에 대해 ‘금병풍, 비단 장막에 푸른 모기장을 치고 마루에 붉은 담요를 깔아 매우 사치스럽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이 일본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심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 일왕을 걱정한 시(詩)

미즈노 신관은 대를 이어 신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흔쾌히 통신사와 관련한 유물을 보여주겠다며 오래된 그림이 들어 있는 두 개의 액자를 내놓은 뒤 이렇게 설명했다.

“첫 번째 그림은 18세기 시모노세키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수십 년 전 제 부친께서 구매한 것인데 복사본입니다. 원본은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통신사의 여정을 담은) 사로승구도’의 일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여기 그려진 선착장이 통신사 배가 처음 닿은 곳입니다.”

붓글씨가 보관된 두 번째 액자에는 1711년 통신사 부사로 이곳을 방문했던 임수간의 시가 담겨 있었다. ‘외로운 고아와 늙은이가 어려운 때를 만나/나라의 운명은 바다 섬 사이에서 위태로웠네/남은 한은 깊고 깊어 바다보다 더하고/황량한 사당 고요한데 생전 얼굴을 의탁했네….”

통신사들이 왜 이런 글을 썼을까…. 미즈노 신관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이곳 바다에 빠져 죽은 안토쿠 일왕을 추모하는 시”라고 했다.

아카마 신궁은 안토쿠 일왕을 기리는 신사였다. 일왕은 1185년 당시 일본을 양분한 다이라와 미나모토 두 가문의 명운을 가른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한 다이라군 쪽이 바다에 안고 뛰어드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죽게 된다. 이후 일왕은 권력을 모두 잃고 상징적 존재로만 남게 되었으며 일본은 무사들이 다스리는 막부시대를 맞게 된다.

이곳에 묵었던 통신사들은 어린 일왕의 비극적 삶을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1604년 일본을 방문해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온 사명대사도 일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통신사들이 막부정치를 비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말한다. 조선을 침략했던 막부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의식해서였을까. 시모노세키에서는 1711년부터 통신사들에 일왕을 모신 사당(현재는 없어졌음)을 공개하지 않았다. ‘성신교린(誠信交隣)’이라는 화기애애한 교류 뒤에도 양국 간의 팽팽한 신경전이 존재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모노세키=김정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