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닷컴 2016.02.20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채식 섭취 줄어든 식습관으로 섬유소 먹고 사는 미생물 붕괴… 암·당뇨·비만 등 질병 유발
건강한 사람의 장내 세균, 관절염·설사병 치료 효과 있어
10퍼센트 인간
앨러나 콜렌 지음|조은영 옮김
시공사 | 480쪽|2만2000원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이란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한 생존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그런데 인간이 보존하려고 애를 쓰는 유전자는 누구의 것일까.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앨러나 콜렌 박사에 따르면 인간이란 미생물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 기계일지 모른다. 사람 몸에는 100조 개가 넘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가 산다. 인체 세포의 10배나 되는 엄청난 수다. 저자는 우리 몸에서 10%에 불과한 인간이 절대 다수인 미생물과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다 같이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인간과 미생물은 공생(共生) 관계에 있다.
과학자들은 오늘날 인간의 몸은 20만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 살던 조상의 몸과 거의 같다고 본다.
당시 인간은 대부분 채식을 했다. 이때부터 장내 세균은 인간이 먹은 식물의 소화를 돕고 대신 영양분을 얻고 살았다.
인간에게는 식물의 섬유소를 분해하는 효소가 10여 개에 불과하지만 장내 세균은 수천 개나 된다.
평화롭던 공생이 깨진 것은 인간 탓이다. 콜렌 박사는 서구식 식단을 주범으로 지목했다.
현대인이 육식을 늘리면서 채식을 통한 섬유소 섭취가 줄었다. 당장 섬유소를 먹고 사는 장내 세균이 타격을 입었다.
파트너가 무너지자 인간도 바로 피해를 봤다.
과학자들은 암이나 당뇨, 비만이 몸에 이로운 장내 세균 군집이 붕괴하고 해로운 장내 세균이 득세하면서 발생한다는
증거를 잇달아 찾아냈다. '사이언스'지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2013년 10대 과학 뉴스'의 하나로 꼽았다.
자폐증이나 우울증도 장내 세균의 균형이 무너져 일어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항생제 남용은 현대병이란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과 같다.
콜렌 박사는 자폐증에 걸린 앤드루라는 아이를 소개했다.
앤드루의 어머니는 항생제 치료 중 아이가 갑자기 자폐 증상을 얻게 된 데 의심을 품었다.
직접 논문을 뒤져가며 연구한 끝에 항생제가 몸에 좋은 장내 세균을 다 죽여 버리고 그 자리를 신경독소를 분비하는
세균이 차지했다는 주장을 했다. 그의 가설은 사실로 드러났다.
어쩌면 오늘날 인간은 미생물의 결핍을 천형(天刑)처럼 안고 태어난다고도 볼 수 있다.
콜렌 박사는 출산과 수유 형태의 변화도 우리 몸의 미생물 붕괴에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몸의 미생물은 대부분 대물림된 것이다. 태아는 출산 과정에서 산도(産道)를 지나가면서 어머니의 몸에 있는
미생물을 물려받는다. 현대인은 이 길도 막았다. 남미에서는 제왕절개로 태어나는 아기가 50%에 이른다고 한다.
어머니의 미생물은 모유를 통해서도 아기에게 전해진다. 분유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깃들여 사는 미생물을 되살리면 질병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체내 미생물의 유전자를 모두 분석하는 '인간 마이크로바이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인간의 유전자를 완전 해독한 게놈프로젝트에 이은 '제2의 게놈프로젝트'로 불린다.
제약업계도 체내 미생물을 신약의 보고(寶庫)로 주목하고 있다.
미국 화이자는 900명의 장내 세균을 분석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미국의 존슨앤드존슨도 바이오벤처와 장내 세균을 이용한 감염성 장염과 자가면역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콜렌 박사에 따르면 미생물 덕분에 똥도 약이 된다.
건강한 사람의 대변에서 장내 세균을 추출해 환자에 이식하는 방법이다.
2013년 클로스트리듐 디피실균(菌)에 의한 치명적 설사병을 대변에서 추출한 장내 세균을 이식해 치료 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다발성 경화증과 류머티즘 관절염에도 효과가 있다는 초기 연구성과가 나왔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현재 클로스트리듐 감염증에 대해서만 장내 세균 이식을 승인했지만,
과학자들은 약이 아닌 수혈과 같은 조직 이식으로 인정해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안의 작은 동반자가 뒤늦게 인간이 건넨 손을 잡아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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