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03-15 03:00:00
문화재硏, 창경궁오층석탑 연구… “충청지역 사찰의 사리탑” 분석
14일 찾은 창경궁 정전(正殿·임금이 정사를 보던 중심 전각) 뒤편 환경전(歡慶殿). 돌계단 앞 10시 방향으로 불탑이 서 있다. 환경전은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된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거주하는 전각). 불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부처님 좌상이 정확히 환경전을 향하고 있었다. 환경전을 찾는 관람객이라면 이 탑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과연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 왕의 침전 앞에 불탑을 세워놓고 감상했을까. 무언가 이상하다.
불탑의 이름은 ‘창경궁오층석탑’. 일제강점기에 어디선가 옮겨진 고려시대 석탑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조사에서 창경궁오층석탑이 충청지역 사찰에서 건립된 사리탑(舍利塔)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전국 사찰에서 마구 옮겨진 고려 석탑의 ‘제자리 찾기’와 관련해 파장이 예상된다.
문화재계에서는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이 탑이 세워진 원래 위치를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서울 강남의 대형 사찰인 봉은사는 수년 전부터 석탑을 자신들의 경내로 이전할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다. 23일 열릴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회에서 석탑 이전 여부가 논의될 예정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기초 학술연구 자료: 창경궁오층석탑’에 따르면 석탑은 1936년경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조선왕실이 제작한 동궐도(東闕圖)에 표시되지 않은 석탑이 1936년 이후 작성된 근대건축도면집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순종을 위로하고 인민의 지식을 계발한다”는 이유로 1908년 창경궁 전각들을 허물고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세웠다. 이 창경궁 공원화는 조선왕조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때 일제는 일종의 관상용으로 전국에 산재한 고려 석탑을 궁궐로 가져왔으며, 일부는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현재 고려 석탑 상당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에 옮겨져 있다.
연구소는 창경궁오층석탑이 고려 중기 충청지역 사찰에 의해 사리탑으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석탑 부재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동일한 ‘반상 흑운모화강섬록암’인 것으로 조사됐고 △사방불(四方佛·사면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닌 탑신 한 면에만 불상을 새긴 고려 석탑은 충남 예산군 석곡리 석탑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게 근거다. 1936년 이후 근대건축도면에 이 탑의 명칭이 사리탑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최근 해체 및 보수가 결정된 경복궁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도 일제가 무단으로 옮긴 고려 석탑이다. 이 탑도 보수를 마친 뒤 어느 곳에 설치할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광국사탑은 건립지가 원주 법천사 터임을 기록으로 전하지만, 이곳은 폐사지(절터만 남은 곳)여서 제대로 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강원 원주시는 본래 위치가 법천사 터가 명확한 만큼 석탑을 제자리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상운 기자
▲ 창경궁오층석탑 뒤로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오른쪽 건물)
과 행각이 늘어서 있다. 이중 기단 위의 1층 탑신(점선)을 확대해
보면 양각으로 조각한 불좌상(아래 사진)이 보인다. 사방이 아닌
한 면에만 불좌상이 새겨진 고려석탑은 이것과 충남 예산군 석곡
리 석탑이 전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불탑의 이름은 ‘창경궁오층석탑’. 일제강점기에 어디선가 옮겨진 고려시대 석탑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조사에서 창경궁오층석탑이 충청지역 사찰에서 건립된 사리탑(舍利塔)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전국 사찰에서 마구 옮겨진 고려 석탑의 ‘제자리 찾기’와 관련해 파장이 예상된다.
문화재계에서는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이 탑이 세워진 원래 위치를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서울 강남의 대형 사찰인 봉은사는 수년 전부터 석탑을 자신들의 경내로 이전할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다. 23일 열릴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회에서 석탑 이전 여부가 논의될 예정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기초 학술연구 자료: 창경궁오층석탑’에 따르면 석탑은 1936년경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조선왕실이 제작한 동궐도(東闕圖)에 표시되지 않은 석탑이 1936년 이후 작성된 근대건축도면집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순종을 위로하고 인민의 지식을 계발한다”는 이유로 1908년 창경궁 전각들을 허물고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세웠다. 이 창경궁 공원화는 조선왕조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때 일제는 일종의 관상용으로 전국에 산재한 고려 석탑을 궁궐로 가져왔으며, 일부는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현재 고려 석탑 상당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에 옮겨져 있다.
연구소는 창경궁오층석탑이 고려 중기 충청지역 사찰에 의해 사리탑으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석탑 부재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동일한 ‘반상 흑운모화강섬록암’인 것으로 조사됐고 △사방불(四方佛·사면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닌 탑신 한 면에만 불상을 새긴 고려 석탑은 충남 예산군 석곡리 석탑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게 근거다. 1936년 이후 근대건축도면에 이 탑의 명칭이 사리탑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최근 해체 및 보수가 결정된 경복궁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도 일제가 무단으로 옮긴 고려 석탑이다. 이 탑도 보수를 마친 뒤 어느 곳에 설치할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광국사탑은 건립지가 원주 법천사 터임을 기록으로 전하지만, 이곳은 폐사지(절터만 남은 곳)여서 제대로 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강원 원주시는 본래 위치가 법천사 터가 명확한 만큼 석탑을 제자리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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