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닷컴 2016.03.24 강형기 충북대 교수·행정학)
여론조사가 춤추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경선 지역에서 여론조사가 실시되고 정당별 지지도 조사도 시시각각 나온다.
그러나 여론이 전적으로 민심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특정 시점에 나타난 민심의 단면일 뿐이다.
워크맨이 MP3로 바뀌고, MP3가 스마트폰으로 바뀌었지만,
여론만 따랐다면 MP3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뀔 수 없었다.
여론조사 기관이 민심을 채집한다면 정치는 민심을 창조해야 한다.
만약 의회가 민심을 반영하는 기능만 한다면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의회를 존치할 필요가 없다.
국민이 모든 것을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다.
국민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라고 질문만 하는 지도자는 이제 버림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여론조사로 나타난 것이 MP3라고 할지라도 민심은 스마트폰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일류 조직들은 '여론 이후의 여론'에 주목하여 '여론을 능가'했다.
지도자는 자신의 정책을 공급하여 새로운 정책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따라서 국민과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선택받아야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Bourdieu)는
여론이라는 것은 '그러한 여론이 있음으로 인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주위에는 헌법 개정보다 이장 선거를 더 중시하는 사람도 있고,
공적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기보다는 기분과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도 많다.
그런 이들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어 생각지도 않던 내용을 질문하고,
무언가 선택을 강요하는 여론조사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여론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여론을 능가해야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여론은 단편적이고 비전과 전략이 부족하며, 책임지는 사람도 없이 그 시비가 엇갈려 있는 경우가 많다.
비전을 가진 지도자라면 때로는 여론과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공자는 '논어'에서 "국민에게 정부의 정책을 따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모든 정책을 이해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고 말했다.
국민을 우매한 존재로 본 것이 아니다.
국가 경영에는 불가피하게 사전에 알려줄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까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신뢰를 바탕으로 '여론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론을 능가해 궁극적인 민심에 따르는 정치를 하려면 또 한 가지의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일사불란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다. 일사불란한 정당이 여론만 따른다면 '비난회피의 정치'로 일관하기 쉽다.
또한 권력적 정체성을 획득하고 힘을 가진 정당이 일사불란을 강조하면
'노(NO)'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경직화되고 곧 이어 여론을 조작하려 든다.
정당은 일사불란이 아니라 집단 지성을 중시함으로써 건강해지는 조직이며,
집단 지성을 통해서 개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스템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총선 정국에서는 일사불란이 더 중시되고 있는 것 같다.
총선 이후의 정국이 벌써 두려워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민심은 여론에 책임을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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