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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닷컴 2016.03.10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와 최근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는 '책은 꼬리에 꼬리 문다' 믿어
도서관은 그들이 상상한 천국… 살아 있는 독자들 정신 속에도 각자가 꿈꾸는 도서관 지어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엄청난 책벌레였다.
그는 스페인어를 비롯해 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구사했기에 국경 없는 독서량을 쌓았다.
지난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르헤스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보르헤스가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몄다기에 찾아가봤다.
보르헤스의 미망인이 2층 집필실로 안내해줬다. 책상과 책꽂이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책꽂이엔 여러 언어로 된 백과사전이 줄지어 있었다.
보르헤스가 가장 좋아한 책은 백과사전이었다.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은 백과사전에서 얻은 방대한 지식을 활용한 단편집이자 백과사전처럼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은 백과사전에서 얻은 방대한 지식을 활용한 단편집이자 백과사전처럼
지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설집이다.
여느 소설과는 달리 각주가 많은 것도 백과사전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형이상학을 얘기하면서 가장 대중적인 추리소설 형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것도 백과사전을 흉내 낸 것이다.
그는 "백과사전은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어서 그다음 내용을 알 수 없기에 스릴과 서스펜스가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강연을 통해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지식을 활용하면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란 찬사를 받았다.
지난달 세상을 뜬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1932~2016)도 백과사전에 버금가는 지식인으로 꼽혔다.
지난달 세상을 뜬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1932~2016)도 백과사전에 버금가는 지식인으로 꼽혔다.
에코 역시 지독한 책벌레였다.
그는 5만권을 소장했다고 한다. 3만권은 밀라노의 아파트에, 나머지 2만권은 시골 별장에 갖다 뒀다.
사람들이 "이 책들을 다 읽었느냐"고 질문하면 에코는 미리 준비한 우스개로 대답했다.
어떤 사람에겐 "이미 이만큼 읽은 책은 대학 도서관에 갖다줬고, 여기 있는 책들은 다음 주에 읽을 것들이오"라고 대답해
기를 죽였다. 어떤 사람에겐 "읽은 건 하나도 없지요, 이미 읽은 책을 왜 보관하겠어요"라고 눙쳤다.
실제로 그는 소장한 책을 거의 다 읽었지만 일부는 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읽었는데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거나 "다른 책을 통해 읽지 않은 책 내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그는 "읽지 않은 책은 언젠가 펼쳐보게 된다"며 방대한 책 수집을 옹호했다.
에코의 글쓰기엔 언제나 보르헤스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40여개 언어로 번역돼 3000만부 넘게 팔린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중세 수도원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무한한 우주의 도서관을 축소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국립도서관장이 된 뒤 시력을 잃었다.
'장미의 이름'에선 눈이 먼 늙은 수도사 호르헤가 수도원 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보르헤스와 에코는 똑같이 "모든 책은 다른 책을 언급한다"는 상호(相互) 텍스트의 세계를 지향했다.
보르헤스와 에코는 똑같이 "모든 책은 다른 책을 언급한다"는 상호(相互) 텍스트의 세계를 지향했다.
보르헤스는 소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을 통해 이야기가 끝없이 갈라지는 소설의 세계를 그려냈다.
에코는 하버드대에서 한 강연을 통해 "소설은 숲이고, 그 숲은 갈림길이 나있는 정원"이라고 보르헤스의 생각을 이어받았다.
여기에서 소설이라는 숲은 잘 다져진 길이 없는 혼돈의 숲이다.
독자는 한 그루 나무 앞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나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간 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고, 또 갈라진다.
그렇게 소설 한 편은 다양한 해석을 낳고, 그로 인해 다른 결말의 소설로 무수히 이어질 수 있다.
'책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이 보르헤스와 에코의 신념이었다.
보르헤스는 흔히 인터넷 시대의 백과사전을 예견한 작가로 꼽히지만, 그는 디지털 문명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다.
보르헤스는 흔히 인터넷 시대의 백과사전을 예견한 작가로 꼽히지만, 그는 디지털 문명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다.
반면에 에코는 인터넷과 전자책 시대까지 겪고 세상을 떴다.
그는 인터넷을 가리켜 "가장 멍청한 신(神)"이라고 비판했다.
엄청난 지식을 축적하지만, 여과되지 않은 지식 뭉치란 점에서 오류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자책은 전기가 끊어지면 무용지물이 된다면서 종이책을 선호했다.
보르헤스는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도 했다.
평생 도서관에서 살고, 자택도 도서관처럼 꾸민 에코가 꿈꾼 천국도 도서관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상상한 도서관은 사후 세계에 있겠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독자들의 정신 속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보르헤스와 에코의 책을 읽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유혹하기에 어느덧 독자 개인의 도서관이 지어지기도 한다.
보르헤스가 꿈꾼 '바벨의 도서관'은 에코의 서재로 구현됐고, 에코의 글쓰기는 숱한 책벌레들의 지식욕을 자극해
각자의 도서관을 꿈꾸게 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천국으로 가는 미로(迷路)의 은유처럼 여겨진다.
독서는 그 미로 속에서 제대로 길을 찾아가려는 여행의 연속이다.
[도서] 바벨의 도서관 (출처-조선일보 2012.04.07 / Books A21 면) ◇바벨의 도서관 전 29권|바다출판사|각 권 8000~9500원 작가 보르헤스(1899~1986)가 주관적이고 독단적으로 가려 뽑은 세계문학 컬렉션. 그가 사랑한 전 세계의 작가 40인의 중·단편 164편을 29권에 담았다. 한 사람의 이름으로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가에 대한 신뢰와 명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 지성과 문인들은 이미 그를 '살아 있는 신화'로 떠받들던 시절이었지만, 작가는 사실 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온전히 자신의 놀라운 기억력에 의지해서 목록을 작성하고 작품 해제를 육성으로 불렀다. 백발의 어둠 속에서도, 암흑의 미궁 속에서도 잊지 못한 작품들이다. 오스카 와일드, 호손, 포, 카프카, 멜빌 등 우리가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작가부터 카조트, 사키, 릴아당, 던세이니, 알라르콘 등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다. 가령 이렇다. 19세기 최대의 독창적 작가로 추앙받는 에드가 알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를 제1권으로, SF소설의 거장 웰스의 '마술가게', 추리소설의 선구자 로버트 스티븐슨의 '목소리 섬', 최초의 SF소설로 불리는 길버트 체스터튼의 '아폴로의 눈',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단편을 고른 '러시아단편집', 허번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등 장르소설과 순문학을 종횡무진한다. 중·단편이 많은 만큼, 우리나라의 대표적 세계문학전집의 리스트와는 거의 겹치지 않는다. 첫 번째 특징은 다양한 장르의 가장 선구적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작품을 엄선했다는 점. 두 번째로는 추리 소설이 많다는 점이다. 그는 유달리 추리가 많은 이유에 대해 "모든 문학장르 중에서 가장 놀이에 가까운 장르"라고 까닭을 밝혔다. 보르헤스는 평생 장편을 쓰지 않았다. 장편 작가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그는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 정신 나간 짓"이라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바벨의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단편 제목이면서,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 인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 성서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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