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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희 칼럼] 低성장보다 심각한 低신뢰·低배려의 위기

바람아님 2016. 2. 18. 10:26

(출처-조선일보 2016.02.18 강경희 경제부장)

과잉 예약 67% 달한 설 귀성 열차표, 낮은 '신뢰·배려 인프라' 수준 드러내
노쇼는 타인에게 손실 끼치는 갑질… 자칫하면 한국 전체가 '불량상품'돼
환불 수수료 높이는 등 가격장치로 소비자 행태 매너있게 유도해야

강경희 경제부장 사진설 연휴를 앞두고 예매 시작하자마자 30분 만에 동난 코레일 귀성 열차표에서 노쇼(no show ·예약 부도) 

비율이 67%나 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남들에게 자리 뺏길세라 일단 '찜'해둔 가수요인데 상당수는 며칠 만에 예약을 취소했으나, 

기차 떠나는 당일까지 노쇼도 꽤 됐다. 경제 수준이 선진국 문턱이니 교양과 매너의 총합도 상당 수준 

올랐거니 했는데, '온라인 줄 서기'라는 익명의 공간에 들어서니 별로 변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민낯이 

일거에 드러난 것 같아 낯뜨거웠다.

원래 항공권 예약에서 쓰이던 이 용어가 본지의 기획 기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적 예약 문화를 

질타하는 대표적 용어가 됐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일이 치열한 생존 경쟁이고 잠시라도 한눈팔면 남들에게 뺏긴다는 피해의식이 퍼져 있으니, 

반드시 구매할 건지 아닌지 생각하기도 전에 예약부터 해두고 상거래 매너는 내팽개치는 소비자가 여전히 많다.

한국 경제는 좋은 물건을 싸게 잘 만드는 제조업 국가로 급성장했지만 그 성장 방식으로는 한계에 다다랐다. 

경제의 파이를 더 키우려면 서비스산업도 더 활성화해야 한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서비스를 비용과 적정 가치로 환산하는 

상거래가 훨씬 어렵다. 

무엇보다 사회 전체에 신뢰와 배려라는 인프라가 깔려 있어야 제대로 굴러가는 경제 영역이다.

파리 특파원 시절, 독일에 당일로 인터뷰 취재를 다녀오느라 비행기표를 산 적이 있다. 

탑승 수속을 다 마쳤는데 탑승구 앞에서 "자리가 없다"며 나를 포함해 7~8명 승객이 탑승을 거절당했다. 

다들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다음 비행기 편을 타고 간 보상으로 항공사가 현금 쿠폰 같은 걸 제공했으나, 

내 업무에 차질이 생겼더라면 그 정도로 보상되지 않을 정도의 큰 피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프랑스가 노쇼로 인한 기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오버부킹(초과 예약) 정책을 고수하기에 겪은 일이다.

결국 노쇼는 서비스 공급자에게든, 아니면 그 서비스를 구매하려는 다른 소비자에게든 피해를 떠넘기는 불량 경제행위다. 

예약 문화가 정착된 프랑스에서조차 노쇼 때문에 그런 황당한 일을 겪긴 했으나, 노쇼 보상책을 포함해 이 무형의 서비스를 

거래하는 데 적용되는 탄력적인 가격 정책 덕분에 중요한 경제 원리도 경험하게 됐다. 

언젠가 갑자기 로마 출장을 가게 됐는데 당일로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공항에서 1500유로에 사야만 했다. 

당시 환율로 300만원이었는데, 비행 거리가 2시간도 안 되는 파리-로마 비행기 표값이 서울-로마 비행기 표값보다 비쌌다. 

반면 같은 항공사, 같은 구간의 비행기표를 출발 몇 달 전에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산 적도 있다. 

오래전에 예매해서 그 긴 시간 도중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인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손님에게는 낮은 요금을, 시간의 

위험 부담을 전혀 지지 않는 손님한테는 비싼 요금을 받는 식으로 시간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정교하게 가격에 반영한 결과다.

그러니까 소비자 양심에만 의지할 게 아니라, 앞서 코레일의 명절 열차표 소동 정도는 환불 수수료를 높이는 등 잘 설계된 

가격 장치로 얼마든지 가수요를 걷어내고,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소비 행태를 덜 야만스럽게, 좀 더 예의 있게 유도할 수가 있다.

문제는 그보다 훨씬 시간 걸리고 어려운 게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서비스 상거래 밑바닥에, 신뢰와 배려라는 인프라를 

깔아 비효율과 불공정을 줄이는 것이다. 가령 작게는 건당 500~1000원 벌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는 택배 기사를 30분씩 

기다리게 하는 것, 음식점 노쇼로 왕창 사둔 음식 재료를 못 쓰게 만드는 행위 하나하나가 타인에게 얼마나 손실을 끼치는 

'갑질'인지는, 거래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면 도무지 이해를 못 하는 '경제 문맹'들이 하는 행위다.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수조원이다. 한국 찾는 외국 관광객을 '일회성 거래'로만 여기고 바가지 왕창 씌우는 

상술이 판치면 한국은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나라'가 된다.  

낮은 신뢰로, 한국 전체를 재구매하기 싫은 불량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부실 경제행위다.


신뢰와 배려가 부족한 사회는 우리 모두 불편할뿐더러, 경제의 체질 개선도 힘들게 한다. 

하긴, 국민에게 큰 바가지 씌우고 큰 갑질하는 지도층, 권력층이 많다 보니 작은 바가지, 작은 갑질쯤이야 별거 아니라는 

도덕적 해이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 고질병이 되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