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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일기 ① 나날이 발전하기

바람아님 2016. 2. 15. 00:14
[중앙일보] 입력 2016.01.23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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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벽안(碧眼)의 철학자가 서울에 살러 왔다. 가톨릭 신자이지만 불교를 더 알고, 마음 수행도 더 깊게 하고 싶어서였다. 스위스 태생의 베스트셀러 작가 알렉상드르 졸리앙(41)이다.

뇌성마비라는 천형(天刑)에 굴하지 않고 한 땀 한 땀 지혜의 샘물을 길어 올렸던 그다. 요즘에는 서강대 인근의 한 아파트에서 아내, 자녀 셋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최근 『왜냐고 묻지 않는 삶』도 냈다.

‘졸리앙의 서울일기’를 새로 연재한다. “장애·비장애를 넘어 인간의 실존은 커다란 일터”라고 믿는 그와 함께 삶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본다.


이곳 서울에서 내가 지혜를 수련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의 도움 덕분이다. 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엄마 배 속에서 탯줄이 목에 감겼고 그것이 나의 운명을 결정했다.

세 살이 되면서부터 장애인을 위한 특수시설에 들어갔고, 내 몸을 다스려 장애의 폐해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은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발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고된 나날이어도 우리 모두에게는 발전의 기회가 있다. 병자나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조차 마지막 순간까지 발전할 수 있기에 삶이란 곧 기적이다. 문제는 발전을 물질적 해프닝으로 몰아갈 때 일어난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꿈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지, 나에게 발전이란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데서 아마도 철학은 시작될 것이다.

 내가 17년 동안 온갖 부류의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온 특수시설에선 단 하루도 발전 없이 지나는 날이 없었다. 삶이 매 순간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희열의 진수다.

샹포르(1741~1794·프랑스 극작가)는 한 번도 웃지 않고 지나간 날은 망친 날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발전을 물질에 국한시킴으로써 고통을 자초한다.

 그런 점에서 희망과 기대는 아주 다른 것이다. 기대란 협소하고 한정된 무엇을 바라는 것, 이를테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심정 같은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마음을 열고 준비된 자세를 갖추는 힘이다.

 무엇보다 발전에 대한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할 수 있다. 삶의 가장 큰 고통은 불만족의 감정 속에 뿌리내린다.

쇼펜하우어(1788~1860·독일 철학자)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을 지평선 바라보듯 한다고. 환자가 바라보는 지평선은 병의 완쾌이고, 가난한 자의 지평선은 돈을 많이 갖는 것이며, 외로운 사람의 지평선은 좋은 동반자를 만나는 일이다.

 그런데 지평선은 다가갈수록 자꾸 뒤로 물러나는 고약한 성질을 가졌다. 가난한 사람이 돈벼락을 맞고서도 종종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 있다. 나는 매일 나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는 의식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발전이 행복의 근원이며, 행복이 발전의 원동력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아무렇게나 탕진하지 말고, 우선 삶의 어느 영역에서 발전하고 싶은지 자문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내가 보기에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영역에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우선 정신적으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력에 정진할 수 있다.

그 다음 육체적으로 과욕과 무절제를 피하고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다 더 많이 연대해 독약 같은 에고이즘과 싸워나갈 수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발전을 경쟁과 혼동하는 것, 남과 비교해 최고가 되려는 욕망이다. 나날이 발전하고자 하는 꾸준한 노력 자체가 핵심이다. 이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의미로든 나의 발전을 돕는 팀 동료일 수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내가 사는 아파트 15층 옥상에 올라 서울이라는 도시를 바라본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과 더불어 나날이 발전할 수 있는 지금, 나는 행복하고 감사하다.

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