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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일기 ② 지혜를 찾는 서울의 이방인

바람아님 2016. 2. 14. 01:09
[중앙일보] 입력 2016.02.1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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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강일구]


에라스뮈스는 말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돼 가는 거라고. 자동반사적인 삶에서 벗어나 각종 꼬리표와 편견을 벗어던지고, 끈질긴 이기주의와 현실에 덧씌운 망상을 탈피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서울의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매 순간이 발전의 기회이자 나를 비워내기 위한 계기임을 잊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 앞에서 범상한 것은 없다. 모두가 특별하다.

우리는 우주의 한 정거장에 기착한 존재. 이 지구라는 곳에서 또 다른 소중한 존재와 마주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남자·여자가 기적의 열매다.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는 습관과 성향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는 일은 항상 중요하다. 고대의 사상가들은 철학을 정신의 운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철학을 배우는 학생을 영적 발전을 위해 단련하는 체조선수로 비유했다.

자유를 향한 도약이 남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시작한다는 아주 구체적인 처방은 바로 그런 비유에서 유래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의 마음에 들거나 남보다 앞서려고 애쓰다 보면 십중팔구 불행한 노예로 살게 된다.

하루는 철학을 배우는 학생이 퀴니코스 학파의 대가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물었다. “선생님, 지혜를 가르쳐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디오게네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청어 한 마리를 끈으로 묶어 온 시내를 끌고 다녀라.”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조롱과 야유를 불러일으키라는 뜻이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관심하고 오만해지자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아무 조건 없이 자유롭게 남을 바라보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디오게네스는 고행 없이 삶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저녁에 귀가하기까지 발에 차이는 모든 돌부리를 우리는 온갖 음험한 긴장과 분노, 격정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 자유의 발걸음을 내딛는 데 적기(適期)란 따로 있을 수 없다. 지금 이곳이 출발선이다.

오늘 당장 판단과 비판을 버리고 이해와 사랑에 충만한 인간이 되는 것 이상으로 내 주변 사람들,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좋은 선물이 또 있을까. 진정한 이해와 사랑은 ‘남이 뭐라고 할까’에 구속받지 않고, 겉모습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의 자세에서 우러나온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매일 청어 한 마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셈이다. 각자의 단점들, 실수들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각종 꼬리표들에 얽매이는 동안 마음의 평화는 물 건너간다.

틈만 나면 우리를 노예로 전락시키는 그 모든 사슬을 도대체 어떻게 끊어내야 할까. 아마 잡다한 역할들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리라.

그런 물음에 우리는 너무 자주 직업, 종교, 사회적 지위, 소속단체 등을 끌어들여서 대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짜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은 그 모든 사회적 맥락을 떠나 자신의 깊은 곳을 차분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나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지켜본다. 옷차림, 생김새, 태도로 환원하지 않고 그들을 더 잘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상점에 가고, 식당에 들어서는 것. 그것은 나날이 더 나아지기 위해 학교에 가는 것이다.

스위스 출신 철학자 / 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