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박 대통령이 무너진 건 권력자로 치른 이번 선거가 처음이지만 권력에 맞설 땐 패배를 몰랐다. 23대 0이란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록과 어슷비슷하다.
11㎝ 커터 칼 테러를 당하고도 “대전은요?”라고 물은 게 10년 전이다. 중앙일보 국회팀장으로 일하던 당시 국회팀 후배 기자가 취재해온 “대전은요?” 특종 기사(2006년 5월 23일자 1면)를 다듬으며 서늘함을 느끼던 기억이 있다. 그때 압도적 우위였던 염홍철 후보를 만났더니 “선거판 쓰나미”라고 혀를 내둘렀다. 한나라당을 탈당해 ‘배신자’로 찍힌 염홍철은 그 쓰나미에 떠내려갔다.
유승민과 염홍철이 박근혜에겐 다르지 않다. 똑같은 배신의 정치다. 그런데 왜 10년 전엔 쓰나미를 만들었고 지금은 쓰나미에 휩쓸렸을까? 옛날엔 약자였고 지금은 강자인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때 고집불통의 강한 지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친노 패권주의에 맞선 여성 지도자는 선거를 어렵고 두려워했다.
당시 퇴원한 박 대표에게 판세를 물었더니 “세상에 쉬운 선거는 없다”며 자신의 선거 얘기를 들려줬다. 차고 다닌 만보계에 매일 10만 보 이상이 찍혔다는 것이다. “운동 중엔 선거운동이 가장 험하다”는 우스갯말도 겸했다. 진정이었을 게다.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이 머리를 숙이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총선 패배를 보는 박 대통령의 생각은 다르다. 총선이 2주일이나 지났다. 청와대는 패인을 꼼꼼하게 따져봤을 터다.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이 많은 민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 뒤에 나온 분석이 “양당체제 정쟁을 심판해 3당 정책대결 체제로 바꾼 게 민의”라니 엉뚱하다 못해 뜨악한 판단이다. 그래서 찾아보니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4년차 선거에 대패한 뒤 “한두 번 선거로 어느 당이 흥하고 망하고, 그런 게 민주주의는 아니다”고 강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3년차 선거 참패 후 “정부는 다시 경제회복과 지속 성장에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만 언급했다.
이런 청와대 인식엔 많은 이유가 있을 게다. 우선 오기 때문일 수 있다. 또 잘해 보려는데 왜 몰라주나 하는 섭섭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감정 외에 선거 결과와 지지율 체감이 뭔가 다를 거란 생각도 든다. 여당 의석이 크게 날아가 의석 분포도가 달라졌지만 정권이 떼밀려 갈 정도로 민심이 떠나간 건 아니란 설명 말이다.
큰 숫자론 가능한 해석이다. 이번에 대패한 새누리당의 선거구 지지는 920만 표(38.3%)다. 4년 전엔 930만 표(36.5%)였다. 투표율은 58%(20대)와 54.2%(19대)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비슷한 득표인데 의석은 30석이나 잃었다. 성난 민심이 원인이지만 승자독식 소선거구제 때문이기도 하다.
역대 선거가 모두 그렇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전국 선거 평균은 산 표가 950만 표, 죽은 표가 948만 표다. 연정을 거부한 박 대통령도 과반을 조금 넘은 지지로 당선됐다. 한 표라도 이긴 승자는 전부 갖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데 패배한 마음은 졌다고 승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표되지 못한 표심은 당연히 장외에 불만으로 살아 있다.
같은 선거 결과에 청심(靑心)과 민심이 다른 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정권이 아니라 국회가 심판받았다는 오진으론 나라를 수술하기 어렵다. 선거만 치르면 1000만 표가 사표가 돼 국민 절반이 선거 결과를 외면하는 게 성숙한 민주주의도 아니다. 그런데도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를 바꾸지 못한 건 거대 양당의 기득권 때문이었다. 역지사지할 수 있을 때, 유불리가 없을 때, 지금이야말로 선거 관련 제도를 정비할 기회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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