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서소문 포럼] 극단의 시대

바람아님 2016. 4. 26. 00:51
중앙일보 2016.04.25. 00:35

먹고살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면? 너그럽게 넘길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한다. 울적함과 스트레스가 쌓이다가 느닷없이 폭발한다. 최근 빈발하는 아동학대나 보복운전이 이와 무관치 않다. 한편으로는 위로받고 싶어 한다. 누군가 고통을 덜어주기를 바란다. 선거 때는 화끈한 공약에 솔깃한다. 때로는 세상이 바뀔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미친 듯 열광한다. 불황의 쓸쓸한 단면이다.

세계는 1929년 대공황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배상금을 내야 했던 독일은 대량 실업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절망의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합리적 해결보다 광기의 도가니를 택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었다. 나치즘 광풍이 불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대공황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힘입어 끝난 게 아니다. 2차 대전으로 전 세계가 쑥대밭이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불황이 심성을 바꾸고, 끔찍한 전쟁을 부른 사례다.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대공황 이후 79년 만에 가장 큰 경제 사건이었다. 그 후 8년째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유럽이 돈을 풀고, 중국이 선방하면서 버텼으나 최근 한계에 다다랐다. 불황이 이어지자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있다. 자극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 재빨리 편승하는 건 정치인이다. 대공황 때처럼.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도널드 트럼프는 극단의 선봉에 서 있다. 미국 사회가 신봉해온 오랜 가치를 허물었다. 자유시장경제를 깎아내리고, 보호무역주의를 외쳤다. “중국에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보복관세를 물리겠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멕시코 이민자들은 미국에 마약과 범죄를 가져왔다”는 막말에 가깝다.


미국 공화당의 주류는 당황했다. 하지만 백인 저소득층은 환호했다. 이들의 울컥한 마음을 트럼프가 파고든 것이다. 트럼프가 뭔가 해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표로 연결됐다. 민주당에선 아웃사이더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가 선전했다. 위기감을 느낀 힐러리 클린턴도 경쟁적으로 좌클릭하고 있다.


일본은 수년 전부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빠져 있다. 아베는 강력한 일본을 내세웠다. 경기부양책(아베노믹스)과 극우 노선(집단적 자위권 등)을 밀어붙였다. 침체에 지친 일본인들은 아베의 거침없는 행보에 열광했다. 최근 엔화가 강세로 돌아서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아베는 이미 장수 총리(전후 5위)의 반열에 올랐다. 극단의 정치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정치인들이 극단의 흐름에 올라탔다. 4·13 총선에서 이런 공약이 쏟아졌다. 새누리당은 한국판 양적완화를 들고나왔다. 선거용 정책이다. 기준금리(현 1.5%)를 내릴 여지가 있는데, 양적완화를 하는 건 일의 선후가 바뀐 것이다. 구조조정보다 돈 찍어내는 데 열중하면 부실기업을 연명시킬 뿐이다. 늘어난 빚은 국민 부담이다. 무엇보다 양적완화는 미국·유럽·일본 같은 기축통화국이 쓸 수 있는 정책이다. 우리는 입장이 다르다. 양적완화를 하면 외화자금이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총선에서 ‘문제는 경제다’를 내건 더불어민주당은 대기업 공격에 집중했다. 김종인 대표는 “한국 경제는 거대 기업, 거대 금융이 독식해 10%도 되지 않는 자들이 90%의 기회를 박탈하는 절망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불황에 지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표현이다. 김 대표의 발언은 총선 승리로 이어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앵그리 20대’가 야당에 표를 던졌다.


경제가 어려우면 극단에 치우치기 쉽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심리가 퍼진다. 이분법으로 판단하고, 내 편 네 편을 가른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중용을 택하는 정치인은 설 땅이 좁아진다. 경제가 나아지지 않는 한 앞으로 선거는 더 꼴사나워질 게 틀림없다. 내년 12월 대통령 선거는 여야 모두 대중을 유혹하기 위해 극렬한 공약을 들고나올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같은 대박을 꿈꾸면서. 그럴수록 통합은 힘들어지고, 불황은 깊어질 것이다.


고현곤 신문제작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