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 같은 중죄를 저지르면 친·인척까지 처벌하는 게 ‘연좌제’다. 한국에선 3족, 스케일 큰 중국에선 9족까지 멸했다. 언뜻 동양의 전유물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과거 독일·러시아에서도 누가 죄를 지으면 부족 전체를 벌하곤 했다. 이 전통이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는 ‘지펜하프트(sippenhaft)법’을 만들어 반역자나 망명자 가족도 벌했다.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는 아예 “망명을 돕거나 신고하지 않은 범죄자의 가족은 5~10년 형에 처한다”는 법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양국의 연좌제는 종전 후 사라졌다. 그럼에도 연좌제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북한이다. 아직도 탈북자 가족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처형된다고 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경우 600명의 친·인척과 지인이 숙청된 걸로 알려져 있다. 북한 외에도 몇몇 인권탄압국에서는 국외로 탈출한 난민의 가족들을 박해한다고 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망명 신청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도록 못 박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탈북자 처리지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원칙이 무시될 때도 적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탈북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낸 적도 있었다. 2006년 북한 일가족 7명이 목선을 타고 탈출해 왔다는 사실을 군경이 언론에 흘려 북의 친척들이 보복을 당했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이 주장을 인정해 당국에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공식 주문했다.
그럼에도 통일부는 지난달 초 “중국 내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서울로 탈출해 왔다”며 해서는 안 될 발표를 했다. 총선을 앞두고 이뤄진 정략적 조치라는 비판이 들끓은 건 물론이다. 이 논란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지난 23일 한 언론매체는 다른 3명의 북한 식당 종업원이 중국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29일엔 지난달 귀순자 가운데 인민배우의 딸이 끼여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인도적 차원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묻고 싶다. 탈북자 가족들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도, 처형돼도 괜찮단 말인가.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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