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서소문 포럼] 막후 협상의 실종

바람아님 2016. 5. 31. 00:03
중앙일보 2016.05.30. 00:46

구조조정을 둘러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의 줄다리기를 보면서 촌스럽게 일한다는 생각을 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부실기업을 어떻게 처리할지, 관련 설비와 인력은 얼마나 줄일지다. 논란이 된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곁가지다. 연일 뉴스를 쏟아낼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로 인해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산업·수출입은행은 조선·해운 등 부실기업 뒤처리를 하다 재무구조가 나빠졌다.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려면 어떤 형태로든 돈이 더 있어야 한다. 정부는 한은이 이들 은행에 돈을 대주기를 원한다. 예전에도 종종 쓰던 방법이다. 일이 꼬인 건 사전조율 없이 덜컥 공론화했기 때문이다. 4월 총선 때 새누리당이 국책은행 자본 확충을 ‘한국판 양적완화’로 포장해 선전했다. 일본 아베노믹스처럼 인기몰이가 될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불행히도 오해와 논란만 키웠다.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양적완화는 전통 방식을 넘어서는 중앙은행의 확장적 통화정책이다.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찍어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유럽·일본이 택한 비상 처방이다.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양적완화에 비하면 훨씬 작은 개념이다. 양적완화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정부와 한은이 조용히 만나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출자를 하든, 펀드를 만들든…. 전문 분야여서 국민이 자세한 내용을 알 필요도 없다. 그걸 여당이 공약으로 떠벌렸다. 정부도 공개 석상에서 한은을 압박했다. 책임과 부담을 단번에 한은에 떠넘긴 셈이다. 그러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건 또 무슨 싸움?’이라며 정부와 한은을 쳐다보게 됐다. ‘중앙은행 독립’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한은은 본능적으로 주춤거렸다. 독립을 내세우지만, 한은 역시 책임지는 상황은 피하고 보자는 계산이 깔려 있다.


훈수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선진국 중앙은행은 양적완화에 열심인데, 한은은 어느 나라 중앙은행이냐’고 비판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정부가 구조조정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돈만 내놓으라고 한다”고 맞받아쳤다. 어느새 기재부와 한은이 룰 미팅도 안 한 채 링 한복판에 올라 싸우는 꼴이 됐다. 쓸데없이 공론의 장으로 끌고 와 새로운 갈등을 만든 셈이다. 다들 지켜보고 있으니 조용하면서 깔끔하게 처리하기 어렵게 됐다. 진퇴양난이다.


한 달여 공방 끝에 양측은 ‘6월 말까지 구체적 방안을 만든다’는 데 겨우 합의했다. 구조조정은 한시가 급하고, 갈 길이 먼데, 출발선부터 삐꺽거리고 있다. 정부와 한은 간에 막후 협상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양측이 미리 조율했으면 모양새를 구기지 않고, 링 위에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소모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축내지 않고,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촌스럽게 일하기는 정부와 정치권이 오십보백보다. 새누리당은 총선 때 공천을 둘러싼 온갖 꼴불견을 생중계했다. 지켜보는 국민은 피곤했다. 피곤이 쌓이다 분노를 느끼고, 그게 표로 연결됐다. 여당의 리더들이 막후에서 논의하는 과정을 소홀히 해 벌어진 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갈등이나 상시 청문회법 논란도 막후 조율이 없었다. 대통령이 3당 대표를 분기별로 만나기로 하면서 ‘협치(協治)’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지만, 청문회법 한 방에 이내 대결 정국으로 바뀌었다. 공개 석상에서 잠깐 만나는 이벤트로는 해묵은 간극을 좁히기 어렵다.


막후 협상은 비밀스럽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잘 활용하면 갈등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죄다 드러내놓고 사사건건 싸우는 게 능사는 아니다. 여·야·정, 당·청, 부처 간에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면서 일이 돌아가게끔 하는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


집권 내내 노론 벽파의 견제에 시달린 조선 정조는 막후 정치를 통해 갈등을 수습했다. 야당 대표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299통의 편지에는 현안을 조율하는 비밀스러운 내용부터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소회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겼다. 백성이 편안할 수 있다면 막후에서 자존심을 꺾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조가 성군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고현곤 신문제작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