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6.13 최보식 선임기자)
['올해의 이민자賞' 수상자… 와타나베 미카씨]
"敗戰 후의 일본은 아버지 不在 사회였다…
그 속에서 나는 우울했는데 한국에 와서 행복 느껴"
"이주 여성 중 조선족 많지만 정작 부각되는 쪽은
외모가 다른 동남아 여성들… 이게 다 포퓰리즘에 의한 것"
와타나베 미카(55)씨는 '올해의 이민자상(賞)'을 받았다. 이주 여성 단체 '물방울나눔회' 회장으로서 이주민들의
한국 사회 적응과 자립 지원에 기여한 공로다. 인터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담은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포퓰리즘 때문에 다문화(多文化)를 과도하게 이슈화하거나 정치 세력화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을 약자로 정의하고 성소수자(?) 등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한글 표현이 미숙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다문화 가정에 대한 통념(通念)과는 다른 게 분명했다.
다음 날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정부 부처, 지자체, 산하단체마다 각종 다문화 행사와 지원 프로그램을 쏟아내는데 이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대부분 매스컴을 끌기 위한 전시성 행사입니다. 국민 세금만 날리는 겁니다.
반복되는 이런 행사에 봉사 요원으로 동원되면서 뭔가 모순을 느낀 사람은 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나쁜 영향만 끼칩니다."
와타나베 미카씨는
“바깥에서 생긴 쓰레기를 집에 들고 오는 내 습관을
남편이 싫어한다”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지,
공짜로 받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공무원들은 책정된 예산을 다 써야 한다는 식이고,
이주민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동원되다시피 하고,
원치 않아도 꼭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존감이 없어집니다."
―사회적 약자인 다문화 가정을 위한 정책과
제도적 지원이 나는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28년 전 제가 한국에 왔을 때는 지금처럼 '다문화
가정'이니 '이주 여성' 같은 말이 없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시민'으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어요."
―이주 여성들이 모두 와타나베씨처럼 배우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외국 생활을 하면 언어와 문화 적응에서 당연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시간을 두고 주체적으로
해결해나가도록 도와야지, 지금 정부 주도의
복지 혜택은 이들을 의존적으로 만듭니다."
―스스로 하겠다는 의욕을 꺾을 만큼 과도한 지원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요.
"이주 여성이 급증한 것은 2003년부터였어요.
다문화가 과도하게 이슈화되면서 정부 예산과 인력이 늘어났고 곳곳에 지원센터를 설치했어요.
'다문화 비즈니스'가 된 거죠.
일일이 찾아가 가르쳐주겠다는 한국어 교실이나 다문화 가정 자녀만을 위한 방과 후 교실 등도 열었어요."
―이들 대부분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입니다. 그렇게라도 정책적 지원을 하는 게 옳지 않은가요?
"현장에서 오래 지켜봤지만, 이런 투자가 실효성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문화 행사나 지원 프로그램이 겹칠 때 어디에 가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따집니다.
이들끼리는 '복지 쇼핑'이라고 말합니다. '공짜'가 반복되니 더 많은 혜택을 받으려는 게 당연해지는 겁니다.
스스로를 '약자' '부족한 존재'라고 받아들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걸 포기하게 되지 않을까요.
정부의 복지 혜택 일변도 정책이 이들을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론적인 복지 논쟁으로 들립니다. 현실에서 그런 혜택이 절실한 이주민이 더 많지 않을까요?
"선별적 지원은 필요합니다. 현장 요구와 맞지 않게 정부 주도형으로 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주 여성 중 조선족이 가장 많고 주류인데, 정작 부각되는 쪽은 외모가 다른 동남아나 중앙아시아 여성들입니다.
이게 다 포퓰리즘에 의한 겁니다. 다문화 정책은 풀뿌리식이 돼야 합니다. 현장을 아는 민간단체가 나서야 합니다."
―이주민 지원 단체가 정치 세력화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예민한 사안이라 조심스럽습니다. 거주 외국인이 200만명쯤 되니까
한편에서는 정치 세력화할 의도로 이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겠다'며 끌어들이려는 단체들도 생겨났습니다."
―와타나베씨는 '물방울나눔회' 회장인데, 어떻게 결성하게 됐습니까?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한·일 문화 교류회'에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2009년부터 KBS 프로그램인 '러브 인 아시아'에 출연했습니다.
출연자들끼리 '물방울나눔회'를 결성했어요.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좀 더 주체적으로 한국 사회에 기여하려는 취지였지요."
―금년이 일본에서 산 햇수와 한국에 정착한 햇수가 똑같이 28년이 되는 해라고 했지요?
"1987년 한국에 처음 왔고 이듬해 한국 남자와 결혼해 정착했어요.
한국 남자를 배우자로 택한 데는 '공적'인 면, 사명감도 작용했어요."
―결혼에 무슨 공적인 면과 사명감이…?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과거 역사를 알게 됐을 때 '일본 정부가 다 못한 책임을 저라도 져야겠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정말 독특하군요. 집안 내력(來歷)이 한국과 인연이 있는 걸로 압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제 할아버지는 만주 철도 간부였습니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나진에서 출생했어요. 패전 후 귀국했을 때 아버지는 열 살쯤 됐습니다.
그 뒤 신일본제철에 입사한 아버지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모르나 알코올중독이 됐습니다. 50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집안 내력을 알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싹튼 게 사실입니다."
―중·고교를 미션스쿨에 다녔다고요?
"예. 우리 학교에서 한국인 목사님을 초빙해 간증을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한 신앙인들의 수난사였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그런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위안부 문제와 '평화 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진 재일 한국인 강제 북송 문제에
대해서도 알게 됐습니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죄의식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 시절에 살았거나 책임 있는 것도 아니고, 과잉된 자의식(自意識)이 아닌가요?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후손이라고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와세다대학 연극과에 진학했는데 그 무렵 공연계에 있는 재일 한국인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한국에 대한 죄의식이 커졌습니다.
애초 연기자가 되려는 개인적 목표보다 대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거죠."
―대의를 위해 살겠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패전 후 일본이 분단됐어야 하는데 한반도가 분단됐어요. 일본은 전쟁에 졌지만 6·25 덕분에 경제 발전을 이뤘습니다.
모든 고통을 한국이 대신 짊어졌습니다. 역사의 신(神)이 있다면 분명히 일본보다 한국을 사랑할 것입니다."
명성황후 1인극 공연 때.
―2014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명성황후 1인극'을 공연했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의 왕비로서, 한 여인으로서 비극적인 삶을 표현하는 심리극입니다.
고등학교 때 '민비암살(閔妃暗殺·쓰노다 후사코 지음)'이라는 책을 읽었지만,
국모(國母)가 그렇게 비참하게 당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사건입니다."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마주 대하면서도 이런 장면이 믿기지 않았다.
―감정이 풍부하군요. 어떻게 공연을 하게 됐습니까?
"연출가 박영 선생님이 일본 공연을 위해 일본인 배우를 찾던 중 저를 만난 겁니다.
작품 번역도 제가 맡았어요. 하지만 일본 공연은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주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국내 공연을 올린 겁니다."
―솔직히 와타나베씨가 상식적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저 같은 일본인에게 '한국이 더 좋은가, 일본이 더 좋은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럴 때면 '그건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 같은 질문처럼 대답하기 힘들다'고
하는 게 정답이지요. 하지만 저는 일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머릿속으로야 그럴 수 있지만, 막상 한국에서 살아보니 더 사랑할 만하던가요?
"패전 후 일본은 아버지의 리더십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자신감을 잃었고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가치관의 혼돈이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좌경 데모가 심했습니다.
그런 아버지 부재(不在) 사회에서 저는 불행했습니다.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 아버지가 살아 있는 사회라는 걸 느꼈습니다.
결혼해서는 시부모, 시동생 부부와 함께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그게 힘들지 않던가요?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일본에서 개인의 행복만 추구하는 삶의 허무를 실감했기에 그런 가족 문화에서
행복했습니다. 가부장적 문화가 후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여성으로서 가부장제를 그리워하니 유별난 개인 취향이군요.
"가정은 보편적 가치로서 중요한 겁니다. 부모가 가정에서 역할과 책임을 버리면서 청소년 비행(非行) 같은 사회문제가
커졌습니다. 자녀 교육 책임이 가정에 있는데, 이를 학교와 정부 책임으로 미룹니다."
―가정에서 할 역할을 숨 막히게 느끼는 여성이 더 많을 겁니다.
"한국 사회가 짧은 기간에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제가 가장 사랑했던 정신문화는 사라지고 있어요.
가치 있는 것, 버려서는 안 되는 것까지 쉽게 버리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한국인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배려 기준이 다릅니다.
일본인의 배려란 '메이와쿠(迷惑)'와 같은 겁니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모호하게 표현합니다.
한국인의 배려는 좀 더 주체적입니다. 후배에게 밥을 사주면서 '덕분에 나도 잘 먹었다'고 인사하지 않습니까."
―지금 와타나베씨는 일본인과 한국인 어느 쪽으로 보일 것 같습니까?
"말을 안 하면 한국인인데,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없어 지지 않습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 끼인 층간인(層間人)이 된 것 같습니다."
―가장 안 바뀌는 습관은 무엇입니까?
"처음 임신했을 때 우메보시(매실 장아찌)가 너무 먹고 싶었어요. 지금은 한국식으로 먹습니다.
안 바뀌는 제 습관이 있다면, 남편이 제일 싫어하는 것인데, 바깥에서 생긴 쓰레기를 집에 들고 와서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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