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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일기 ⑩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향해 달려가나

바람아님 2016. 6. 19. 23:56
[중앙일보] 입력 2016.06.04 01:01

“천천히 해!”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와 헤어질 때 늘 씩씩한 표정으로 그런 인사말을 날렸다고 한다. 우리도 한번 써먹어 보는 건 어떨까.

긴급하거나 중요한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 얼렁뚱땅 넘어가자는 뜻이 아니다. 그랬다가는 자꾸 기회를 놓치고 삶을 유보하는 태도에 중독되고 만다. 당장 뛰어들어 맛보고 즐겨야 함에도 항상 넘겨짚기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 “이 다음에 좋은 일자리를 얻으면 나도 보란 듯이 살아야지.”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면 그땐 행복하게 살 거야.” 끝없는 노래가사 같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꿈들은 우리를 꿈에서 멀어지게 한다. 문제는 지금 여기 있지 않은 다른 무엇을 항상 갈구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삶의 문제점을 정확히 간파했다. 행복이라는 것을 지평선처럼 생각하는 한, 우리가 다가가려고 애쓸수록 그것은 멀어지기 마련이라고.

따지고 보면 인생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하나의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진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독일의 물리학자 리히텐베르크처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 줄 사람이 또 있을까. “오래 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점을 최대한 떨어뜨려 그 둘을 잇는 선의 길이를 늘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두 점의 위치를 신의 뜻에 맡기고 최대한 천천히 그 선 위를 걸어가는 것이다.”

삶에 대한 신뢰로 무장하고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라는 숭엄한 권고. 시간을 운용하고 체험하는 구체적인 방식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속도를 조절하는 여유, 코끼리처럼 한 발 한 발 정확하고 안정되게 내딛는 걸음걸이는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운가. 존재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 자잘한 욕망을 좇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인생의 급행열차에 몸을 싣는지. 유명한 관광지만을 줄지어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느라 정작 그 사이사이 신선한 만남과 진솔한 체험을 놓치고 마는 관광객은 진정한 여행자가 될 수 없다.

행복이란 인위적인 거래와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음미돼야 할 어떤 맛이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우리는 행복을 마치 패스트푸드처럼 먹어치울 생각만 하는 걸까.

교황 요한 23세는 말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신이 바로 그 행동을 위해 우리를 특별히 창조했음을 생각하라고.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욕망으로 들뜨지 않고도 세상을 얼마든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기차를 놓쳤을 경우 내게는 두 가지 대처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오늘 참 재수 옴 붙었다며 버럭 화부터 내는 것이다. 반면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차분하게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인가, 내가 아는 어느 여행광은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것이 즐거운 여행의 비결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시곗바늘을 쏘아보며 택시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보다는 일찌감치 공항 벤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게 좋다는 취지다. 그것은 결코 서두르는 태도가 아니라 준비하는 태도다. 서두르는 사람이 앞질러 모든 일을 넘겨짚어 부질없는 계획에 골몰한다면, 준비하는 사람은 순간순간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놓고 완벽한 포텐셜을 갖춘다.

행복하고 싶다면 무게를 더는 것이 요령이다. 이 약속장소 저 약속장소를 하루 종일 전전하며 평생을 보낼 것인가. 끝없는 스케줄의 연속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건강한 인생을 살기 위해 머릿속에 간직할 간단한 질문 하나. 궁극적으로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무엇?

졸리앙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