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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일기 ⑪ 여행가방 한구석에 뜻밖의 선물 위한 공간 비워두세요

바람아님 2016. 6. 20. 23:58
[중앙일보] 입력 2016.06.18 00:37

여행가방을 꾸릴 때마다 예리한 질문 하나가 비수처럼 폐부를 찌른다. 진정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럴 땐 약간의 사고실험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만약 내일 무인도로 떠난다면 무엇을 가져갈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거다. 꼭 챙겨야 할 속옷 몇 장과 양말, 비상약, 치약과 칫솔, 기타 등등.

우리 중 약간 정신 나간 사람은 당장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그야 당연히 스마트폰하고 충전기지.” 굳이 무인도를 떠올려서가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인생의 짐을 조금씩 줄여 가면서 보다 자유롭고 덜 소모적인 삶의 방식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떤가.

행복은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다. 어느 수피 수도승의 의미심장한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을 살 순 없습니다.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을 살 순 없습니다.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을 살 순 없습니다. 책은 살 수 있지만 지식을 살 순 없습니다. 지위는 살 수 있지만 존경을 살 순 없습니다. 의사는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순 없습니다. 피는 살 수 있지만 목숨을 살 순 없습니다. 섹스는 살 수 있지만 사랑을 살 순 없습니다.”

단순한 삶의 도구로서 일상을 돕는 것에 그쳐야 할 사물들이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조건 짓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스마트폰 사용과 인터넷 접속은 그 자체로 이미 현대인의 상수(常數)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의 방식, 존재의 양태, 타인과의 관계가 그로 인해 심각하게 변질됨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옷 한 벌 사 입는 것처럼 평범한 문제가 우리를 타인의 시선 안에 가두고 행동을 좌지우지한다. 생각해 보라. 몸에 걸친 옷, 서가에 꽂아둔 책, 집안을 꾸민 가구를 통해 인간을 판단하는 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

인간관계를 물질적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해방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갖는 가치를 따질 때 왜라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모든 경험은 그것이 하나의 선물일 때 진정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의 관계를 시장논리로 바라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 수퍼마켓 같은 장소는 아주 효과적인 수행의 관문이 될 수 있다. 지갑을 열지 않고 그 화려한 진열대 앞을 경쾌하게 지나칠 수 있다면, 그렇게 절약한 약간의 금전으로 당장 누군가에게 소중한 도움을 주고 참다운 연대를 시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것이야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했다. 특히 소유로는 결핍을 메울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는 매우 훌륭한 의사다.

“행복을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곳의 참다운 삶에 구체적으로 몰입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존성을 강화할 뿐인 물욕이 행복에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이 그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점이다.

자, 오늘이라도 우리의 소중한 의사 에피쿠로스의 목소리로 하루를 열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모두는 단 한 번 세상에 태어난다. 두 번은 죽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원을 고려하며 살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내일이 어떨지 모를 당신은 참다운 즐거움을 미룬다. 인생이란 미루는 가운데 시들어 버리는 어떤 것. 우리는 그것을 제때 향유하지 않다가 어느 날 덜컥 죽고 만다.”

나부터 이제는 여행가방 한구석에 뜻밖의 선물을 위한 빈 공간을 남겨 두어야겠다.

졸리앙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