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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 생전 퇴위로 본 세계 장수 왕들의 운명

바람아님 2016. 8. 29. 00:27
조선일보 : 2016.08.28 13:46

[주간조선:국제]
 

아키히토(明仁·82) 일본 국왕이 생전 퇴위의 뜻을 밝히면서 오랜 기간 재위해온 세계 각국 장수(長壽) 왕들의 퇴위 여부와 후계 체제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군주제(monarchy)에선 국왕이 사망한 경우 왕세자가 즉위하면서 권력이 승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왕이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의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도 생전 양위는 매우 드문 경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권력의 무상함을 느껴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과 태종에서 세종으로의 양위,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이 순종에게 강제 양위한 경우가 있을 정도다.


군주제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에서도 국왕이 생전에 스스로 퇴위를 결정한 사례는 많지 않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키히토 국왕은 지난 8월 8일 “차츰 진행되는 신체의 쇠약을 생각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키히토 국왕은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기 전에 퇴위하는 것이 좋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명했다. 


아키히토 국왕의 퇴위가 실현된다면 생전 퇴위는 1817년 고카쿠(光格) 국왕 이후 처음이다. 세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왕실인 일본 왕실 2700년의 역사에서 생전 퇴위는 일부 있었지만 일본이 근대화된 후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1947년 제정된 왕실 관련 법률인 ‘황실전범(皇室典範)’에는 국왕이 종신 재위를 하는 것으로 돼 있어 이에 대한 후속 절차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국왕이 조기 퇴위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거나, 아키히토 국왕의 경우에만 조기 퇴위를 허용하도록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 /AFP·연합

평화주의자 아키히토의 선택

아키히토 국왕은 갑작스러운 퇴위 결정의 이유로 자신의 건강 악화를 내세웠지만, 일각에선 아베 신조 총리의 극우 행보에 제동을 걸기 위한 ‘고육지책’이란 말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아키히토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다. 그는 지난해 8월 15일 종전 70년 전몰자 추도식에서 연설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앞선 전쟁을 깊이 반성한다”면서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일본 국왕이 전몰자 추도식에서 과거사를 반성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아키히토의 아버지 히로히토(裕仁) 국왕(재임 1926∼1989)은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을 묵인하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를 침략해 학살을 자행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1933년 12월에 태어나 11세에 일본의 패전을 지켜본 아키히토 국왕은 1989년 1월 왕위를 계승한 이후 평화주의에 대한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왔다. 아키히토 국왕은 사이판, 필리핀, 팔라우 등을 방문해 전몰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2005년 사이판을 방문했을 땐 예고 없이 한국인 희생자 추도 평화탑에 들러 묵념까지 했었다. 그는 2015년 신년 소감에서도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매우 중요하다”면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언급했다. 아베 총리와 집권 여당인 자민당은 개헌을 통해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들고 국왕을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권한을 갖는 ‘국가원수’로 삼으려는 의도를 보여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평소 평화헌법 수호를 중시하며 극우세력의 역사수정주의를 경계해온 아키히토가 생전 퇴위라는 카드로 개헌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라고 분석할 수 있다.


아키히토가 퇴위할 경우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는 장남 나루히토(德仁·56) 왕세자이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가쿠슈인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머튼대학에서 템스강의 수운(水運) 분야를 공부했다. 1993년에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으로 자유분방하고 촉망받던 외교관이었던 마사코(雅子)와 결혼했다. 슬하에는 아이코(愛子) 공주만을 두고 있다. 나루히토는 아버지처럼 평화주의를 추구해왔다. 그는 지난해 2월 23일 55번째 생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겸허하게 과거를 되돌아보고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 부부. /위키피디아

스페인 카를로스 국왕도 왕권 양위

일본처럼 스페인에서도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2014년 6월 고령을 이유로 펠리페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겼다. 당시 76세였던 카를로스 국왕은 1975년 11월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에 왕위에 오른 뒤 39년간의 재위 기간 중 스페인의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으로 꼽힐 정도로 국민의 사랑도 받았다. 카를로스 국왕은 “새로운 세대가 마땅히 주역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며 퇴위 이유를 밝혔다. 왕위를 물려받은 펠리페 6세(48) 국왕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요트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등 젊고 건강한 이미지로 국민의 기대를 받고 있다. 


카를로스 국왕에 앞서 2013년 1월 베아트릭스 네덜란드 여왕은 75세의 나이와 건강을 이유로 왕세자 빌럼 알렉산더르에게 왕위를 넘겼다. 알베르 2세 벨기에 국왕도 2013년 7월 79세 나이로 업무 수행이 어렵다면서 왕세자 필리프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카타르의 경우 셰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국왕이 2013년 6월 61세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33세인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왕세자에게 왕위를 이양했다. 중동 왕정국가에서 국왕이 생전에 자발적으로 양위한 것은 당시가 사상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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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왼쪽부터), 찰스 영국 왕세자,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 /위키피디아

반면 엘리자베스 2세(90) 영국 여왕은 왕위를 넘긴 국왕들보다 나이가 더 많고 재위 기간도 65년이나 되지만 퇴위 및 왕위 승계에 대해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1952년 25세의 나이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에서 최장기간 집권한 군주이다. 또 국왕이 사망해야 왕위 승계가 이뤄지는 영국 왕실의 전통 때문에 퇴위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2세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왕실 전기 작가인 로버트 잡슨은 “엘리자베스 2세의 건강이 나빠질 경우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가 섭정 형식으로 대신 통치할 수 있겠지만, 누구도 여왕이 왕위를 포기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68세인 찰스 왕세자에겐 ‘영원한 왕세자’라는 수식어마저 붙었다.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잇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 사랑을 받던 다이애나와 이혼하고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난 뒤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하면서 국민의 여론이 돌아섰기 때문이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가 결혼한 지 10여년이나 지났지만 카밀라는 아직까지 세자빈 칭호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찰스 왕세자 대신 그의 아들이자 승계 서열 2위인 윌리엄(34) 왕세손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도 있다. 국민들이 윌리엄 왕세손을 찰스 왕세자보다 차기 국왕으로 더욱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면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잇지만 바로 퇴위하고 윌리엄 왕세손을 등극시킬 것이란 설도 있다.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 /AP 뉴시스

‘살아있는 신’ 푸미폰 태국 국왕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해온 군주는 푸미폰 아둔야뎃(88) 태국 국왕이다. 국민들로부터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을 받아온 푸미폰 국왕은 지난 7월 9일로 즉위한 지 70년이 됐다. 1932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태국 왕실의 위상은 상당히 축소됐지만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푸미폰 국왕이 존경을 받아온 것은 국민을 위한 헌신 때문이다. 푸미폰 국왕은 막대한 왕실 재산을 농업 및 지역 개발 사업에 투자하는 등 ‘로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사업 영역은 농업, 수자원, 환경, 고용, 보건, 복지 등을 망라했으며, 크고 작은 규모의 로열 프로젝트가 자그마치 4000여건에 달한다. 특히 재임 기간 무려 19차례의 쿠데타와 17회에 걸친 개헌을 겪으면서 최악의 상황을 막는 구심점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푸미폰 국왕은 1973년 군부가 민주화 학생 시위대에 발포하자 학생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궁전 문을 개방했다. 푸미폰 국왕은 1992년 쿠데타를 기도한 수친다 크라프라윤 총리와 민주화 운동의 기수인 잠롱 스리무앙 방콕 시장이 갈등을 빚자 이들을 왕궁에 불러 무릎을 꿇어앉히고 준엄하게 질책했다. 결국 수친다 총리는 사임하고 망명했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푸미폰 국왕이 쿠데타를 승인하느냐 여부가 정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했다. 2014년 5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출신의 프라윳 찬-오차 총리가 푸미폰 국왕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프라윳 찬오차 태국 총리. /AP 뉴시스

푸미폰 국왕은 2009년부터 건강이 악화돼 각종 수술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병석에서 지내고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태국에선 푸미폰 국왕의 건강과 후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왕실 승계법에 따르면 국왕은 왕실 가족 중 누구라도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다.


푸미폰 국왕은 1950년 시리낏 왕비와 결혼한 이후 슬하에 1남3녀를 낳았다. 장남인 마하 와찌랄롱꼰(64) 왕세자는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다. 와찌랄롱꼰 왕세자는 세 번 결혼했으나 세 번 모두 이혼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민들의 신뢰가 푸미폰 국왕만큼 두텁지 않다. 반면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마하 차끄리 시린톤(61) 공주는 인기가 상당하다. 10대 때부터 푸미폰 국왕을 따라다니며 ‘로열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해왔다. 태국 국민들은 시린톤 공주를 ‘쁘라텝’이라고 부른다. ‘천사 공주’란 뜻이다. 시린톤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려면 푸미폰 국왕이 와찌랄롱꼰 왕세자의 후계자 지명을 철회해야 가능하다. 군부는 대부분 와찌랄롱꼰 왕세자를 지지하지만 일부는 시린톤 공주도 지지하고 있다. 때문에 푸미폰 국왕 사후 자칫하면 왕위 계승을 놓고 혼란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누가 왕위를 계승하든 푸미폰 국왕만큼 국민들을 결집하지는 못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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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왼쪽부터), 무함마드 사우디아라비아 부왕세자, 마하 와찌랄롱꼰 태국 왕세자. /위키피디아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절대 권력자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는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81)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사우디에서 국왕의 권한은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이다. 성문헌법은 존재하지 않고 정당도 인정되지 않는다. 의회는 없으며, 4년 임기의 150명 의원으로 구성되는 자문기구가 이를 대신하고 있는데 국왕이 자문위원을 임명한다. 자문기구가 법안을 제출하여 국왕이 재가하면 칙령이 된다.


사우디는 1932년부터 지금까지 압둘 아지즈 빈 압둘 라흐만 이븐 사우드 초대 국왕의 여섯 왕자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해왔다. 사우디의 왕위 계승은 특이하게도 동생으로 이어진다. 초대 국왕의 공식적인 부인은 모두 17명이며, 자녀는 모두 80명이다. 동생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바람에 왕위 등극 시기가 너무 늦어지다 보니 왕세자는 물론 차기 후계자까지 너무 고령인 데다가 왕위 계승을 놓고 자칫하면 권력 투쟁에 빠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월 즉위한 살만 국왕은 왕위 계승의 방법을 바꾸었다. 살만 국왕은 지난해 4월 칙령을 통해 조카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알 사우드(56) 내무장관을 왕세자로, 자신의 셋째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31) 국방장관을 부왕세자로 각각 책봉했다. 살만 국왕이 형제 승계의 불문율을 깨고 조카를 왕세자로 책봉한 것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무함마드 부왕세자가 앞으로 왕세자가 되고 왕위까지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살만 국왕은 리야드 주지사이던 2009년부터 무함마드 부왕세자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곁에 두면서 일을 배우도록 했다. 킹사우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왕족들과는 달리 부인을 한 명만 둔 신세대이다. 사우디는 전체 인구 3000만명 중 70%가 30대 미만의 젊은층이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비해 ‘비전 2030’ 계획이라는 국가개조 작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비전 2030 계획은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 광공업·관광·금융·물류 등 비(非)석유 부문을 개발하기 위한 대대적인 경제 개혁 청사진이다. 무함마드 부왕세자는 자신과 같은 나이 또래인 국민들을 위해 석유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들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카부스 빈 사이드 오만 국왕. /오만TV

후계자 없는 오만의 카부스 국왕

사우디처럼 중동의 전제 왕정국가인 오만의 경우 후계자가 없다. 카부스 빈 사이드(75) 국왕은 29세이던 1970년 7월 무혈 쿠데타로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부친 사이드 빈 타이무르 전 국왕을 폐위시키고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국가 재정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석유 수출 수입을 바탕으로 오만을 개방적인 현대 국가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한 차례 이혼 경력만 있는 카부스 국왕은 현재까지 독신으로 살며 슬하에 자식이 없다. 불확실한 후계구도가 잠재적인 정국 불안의 요소로 꼽히자 카부스 국왕은 1996년 기본법(헌법에 해당)을 공포하면서 자신의 유고 시 3일 이내에 왕가 회의인 통치가문위원회에서 후계자를 책봉하도록 했다. 중동의 각종 분쟁에 중재 역할을 하면서 외교 전략가란 말을 들어온 카부스 국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알라의 뜻일지도 모른다.


인류의 오랜 역사적 산물인 군주제는 21세기 들어 서서히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아키히토 국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푸미폰 국왕, 살만 국왕 등은 모두 고령으로 인생의 종착역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이들의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들이 선왕만큼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을지는 미지수이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편집=최원철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20호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