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2.06 길해연·배우)
낭독 공연 연습을 위해 오랜만에 극단 연습실에 갔다.
조연출이 대본을 돌리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본이 너무 훌륭해서? 아니다.
"야, 이거 10포인트 아니야? 하나도 안 보여!" 누군가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고,
작은 글자에 당황해 주섬주섬 눈치를 보며 안경을 꺼내거나 대본을 멀리 뒀다 가까이 끌어왔다
눈의 초점을 맞춰보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노안'이라는 것이 아직도 먼 나라 얘기로만
느껴지는 젊은 후배들은 그런 선배들을 멀뚱하니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아이고, 너도 벌써 안 보이니?" "작년까진 멀쩡했는데 올해 들어 갑자기 이래요."
"아, 이거 참… 안경 안 가지고 왔는데…."
"난 12포인트 정도는 볼 수 있는데… 완전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거 같네."
노안이 시작된 사람들끼리는 갑자기 할 얘기가 많아지고 순식간에 친밀감의 정도가 강해졌다.
눈에서 시작된 나이 들어감의 초기 증세에 대한 이야기는 점차 늘어나는 다른 증세에 대한 이야기로 불붙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의 끝은 10포인트 대본에 대한 원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연습 내내 우리는 겨우 글을 깨치기 시작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절절매며 더듬거리며 키득거리다,
"그래, 이제는 나이 들어감의 증세를 인정하자" "돋보기를 부끄러워 말고 싸들고 다니자" 그렇게 소박한 다짐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스무 살 초반부터 서로를 지켜봐왔던 나의 동료들을 한명, 한 명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젊음의 증표를 하나씩 내주면서 우리는 대신 뭘 얻었을까?
누구는 뾰족했던 성격을 내주고 너그러움을 얻었고 또 누군가는 이기심을 내주고 배려심을 얻었다.
가만히 사람들을 들여다보니 나이 들어 간다는 게 그렇게 억울해할 일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쉬는 시간 "에구구" 절로 신음 소리들을 내며 허리를 두드리게 된 우리들….
세월에 젊음을 다 내주었을 때 대신하여 지혜로움과 너그러움,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세상살이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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