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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박근혜의 대국민 호소

바람아님 2017. 2. 28. 23:48
[중앙일보] 입력 2017.02.28 02:15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존경하는 이정미 재판장님과 다른 여러 재판관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출석한 것은 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에 대한 변론은 대리인단이 제출한 서면진술서로 대신하겠습니다. 다만 탄핵심판과 관련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려스러운 사태에 관해 국민 여러분께 호소의 말씀을 드리고자 나왔습니다. 재판장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네, 허락합니다. 말씀하십시오.”


“평생 손에 쥐고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바람처럼 사라지므로 권력은 허무한 것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처음 대권에 도전하던 2007년 펴낸 자서전『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있는 말입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금덩어리도, 명예나 권력도 아니다. 그것들은 한순간 사라지고 마는 한 줌 재에 불과하다”는 말도 했습니다. 일찍이 영욕(榮辱)의 롤러코스터를 몸소 체험한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 권력의 덧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헌재의 최종변론에 출석해 박 대통령이 이렇게 말해 주기를 내심 기대했습니다.
 
“저로 인해 추운 겨울 촛불과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 나와 고생하시는 국민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자초지종을 떠나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 제 잘못이고, 제 책임입니다. 지난 주말 광장을 뒤덮은 태극기와 촛불의 물결을 보면서 저는 너무나 걱정스러웠습니다. 저 때문에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져 극단적 대립과 갈등의 늪으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왜 억울하고 섭섭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책망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사귐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명심보감』의 한 구절에서 많은 위안과 평안을 얻었다는 박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직접 헌재에 나와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헌재의 결정이 어느 쪽으로 나도 엄청난 후유증이 예상됩니다. 그래서 헌재의 최종 선고 전에 조건 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탄핵심판 절차를 끝까지 진행해 결론을 내야 한다는 주장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혼란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최종 선고가 나기 전에 먼저 사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헌재는 법에 정해진 절차와 일정에 따라 심판 절차를 완료해 주시기 바랍니다. 헌재의 결정에 제 운명을 맡기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나는 대한민국과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박 대통령의 마음은 진심이라고 믿습니다. 그 대한민국이 지금 두 쪽으로 갈라져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솔로몬의 심판에 아이의 운명을 맡긴 생모(生母)의 심정으로 이렇게 호소했어야 합니다.
 
“태극기를 드신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저에 대한 헌재의 결정이 인용 쪽으로 나더라도 기꺼이 결과를 수용하실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헌재의 결정은 대한민국 헌법기관의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결정입니다. 이를 부정한다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은 법치의 토대 위에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태극기 집회에서 들리는 ‘아스팔트의 피’ ‘내란’ 운운하는 험악한 말들은 제 생각과 완전히 다릅니다. 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불복(不服)이란 말은 입 밖에도 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촛불을 드신 국민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설사 헌재에서 기각 결정이 나더라도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책임에서 제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저의 정치적 권위는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되는 순간 사라졌고, 헌재에서 기각 결정이 난다고 해서 회복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헌재에서 기각 결정이 나도 현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가장 이른 시일 내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법적 절차에 따른 사법적 책임도 기꺼이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 촛불과 태극기를 모두 내려놓으시고 차분히 헌재의 결정을 기다려 주실 것을 눈물로 호소합니다.”
 
내일은 3·1절입니다. 98년 전 우리 선배들은 지역과 종교, 출신을 떠나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마음으로 떨쳐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내일 태극기와 촛불 군중 모두 최대 규모 집회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나라가 두 동강 나 내전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심히 걱정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허망함과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깨달음이 진정이라면 모든 걸 내려놓고, 내일 아침 국민을 향해 간절한 호소의 목소리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박 대통령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입니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