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전시·공연

현대미술의 화두는 몸, 붓 대신 손으로 그리다

바람아님 2017. 3. 1. 23:54
오마이뉴스 2017.03.01 14:14

[전인아개인전_2017 색色, 동動] 금산갤러리에서 3월 3일까지


 전인아 개인전이 열리는 '금산갤러리' 데스크 위로 전시제목이 보인다
ⓒ 김형순

전인아(CHUN Inah, 1970-)작가의 9번째 개인전이 중구 회현동 금산갤러리에서 3월 3일까지 열린다. 제목은 '색色, 동動'이다. 색이 지니는 생동감을 추상적인 형상과 모호한 선으로 오버랩시킨 회화작품과 그걸 부조로 확장시킨 작품 등 54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창작동기에 대해 "내 작업은 살아있는 세포처럼 쉼 없이 움직이며 그 생성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작품도 생물체처럼 계속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가. 이번 전에서도 역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제목은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보다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색(色)으로 우주만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움직이게(動) 그리고 싶다는 것과 더 나아가 사람의 마음마저도 요동치게(動) 그리고 싶다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


태초의 그림을 찾아서

 전인아 I '주작#1' 종이에 혼합재료 51×69cm 2017. 천지만물을 움직이게 할 만큼의 힘이 느껴진다.
ⓒ 김형순

작가가 추구하는 '색으로 동을 그리는' 즉 한국적 회화의 원형이 살아있는 그림은 어떤 것인가? 결국 모든 영감의 원천은 자국의 문화전통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을 수밖에 없다. 서양미술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왔듯 한국미술은 고구려벽화에서 왔다고 봐야 하리라. 위 작품도 역시 고구려 사신도 중 '주작'을 작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 벽화하면 '수렵도'와 '사신도'를 떠올린다. 사신도는 신성한 동물인 '봉황, 청룡, 백호, 현무'가 승천하는 기운을 그린 것이다.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이고, 사계절과 오행사상에서 연유한 하늘의 28 별자리를 상징하는 천문도이다. 이런 그림은 번잡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봐도 그렇지만 작가에게도 엄청난 창작의 자극제가 되리라.


거기에서 고구려인의 의식주는 물론 여가생활, 교통수단까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림엔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걸 넘어서려는 꿈과 이상세계도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잘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고구려를 다시 보게 된다. 한국회화의 원형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 벽화가 왜 이렇게 다이내믹한가? 그것은 태양에서 잉태된 하늘의 자손이라는 자긍심과 함께 당시 인도 등 서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나누는 개방국가였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5세기말에는 넓은 만주벌판까지 영토를 차지한 최강대국이 아니었나. 위 '주작'만 봐도 그런 기개가 느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기백이 아닌가 싶다.

 전인아 I '봉(鳳)#1' 종이에 혼합재료 95×70cm 2017
ⓒ 김형순

위 '봉(鳳)'은 주작의 후속 작이다. 그림 안에 이중프레임을 두어 입체미를 더한다. 마치 '봉'이 박차고 그림 밖으로 나올 것 같다. 여기 청색은 신성함을 나타낸다. 불길처럼 일어나는 봉황은 닭, 용, 뱀, 기린, 사슴, 거북, 제비 등이 유기적으로 융합된 상상의 동물이다. 이런 그림은 초월과 승천, 환생과 엑스터시, 불사와 불멸을 상징한다.

봉황은 길조이고 '신조'(神鳥)라고도 하다. 그래서인지 옛 고궁이나 고전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봉황은 음양오행에서 남방을 관장하고 불을 다스리는 여름의 신(神)이기도 하다. 두 날개를 확 펼치는 모습이 원기로 넘친다.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을 말한다. '주작(朱雀)'으로도 불린다. 그 신체 자체가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구조로 되어 있단다.


작가가 사신도에서 얻은 건 뭘까? 우리 조상이 이루려 했던 삶의 가치와 미적 감각, 역사와 우주와 종교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노력 등. 작가는 여기서 우리문화 원형의 한 갈래로 보고 회화의 원류를 얻을 수 있는 대표 콘텐츠로 여기는 것 같다.


근원적 모태인 '매트릭스'를 생성시키는 그림

 전인아 I '화조#1' 종이에 혼합재료 69×51cm 2017. 이런 '화조'는 상서롭기도 하고 성스럽기도 하다
ⓒ 김형순

앞서 언급했듯 작가는 완성된 존재(be)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생성(become)에 초점을 둔다. 위 '화조'를 보니 활짝 펼치는 기개가 강렬한 운동감(動)으로 느껴진다. 또 그 변화무쌍한 몸짓이 지축을 흔들 것 같다. 작업을 하면서 "색을 통해 동이 일어나는 순간"을 경험한 것인가. 여기에서 탯줄 같은 생명의 기운도 감지된다.

전인아는 바로 이런 생명의 원류를 찾아주는 근원적 모태 즉 '매트릭스'라는 주제를 2007년부터 즐겨 다루어왔다. 이런 미학은 쉽게 말하면 죽어가는 것을 다시 살려내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생과 부활의 이미지가 있다. 예컨대, 억눌린 감정을 표현한다거나 지친 삶에 마음에 여유를 찾아주고 축제의식을 복원시키는 그런 역할 말이다.


위 작품의 구성을 보면 안으로 대상이 집중돼 있고 밖으로는 기가 흩어져 있다. 그렇지만 안팎이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라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이런 긴장과 이완의 대조는 리듬감을 낳는다. 이 작품은 역시 고구려 벽화에서 받은 영감이 커 보인다. 작가가 강조하는 매트릭스를 잘 구현한 매우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그녀는 운명적으로 화가(?)다

 전시장에서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전인아 작가(가운데)
ⓒ 김형순

전인아 작가는 우리문화를 잇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사재를 털어 우리문화를 지킨 '간송'의 손녀다. 아버지는 서울대 미대교수를 역임한 '전성우' 화백이고, 어머니는 김광균 시인의 딸로 이화여대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김은영' 매듭장이다. 언니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인지' 학예연구관이고, 남동생은 간송문화재단 '전인건' 사무국장이다.

작가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후, 한 때 작가적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3년간 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결혼 후 육아 등으로 바쁘게 지내다가 결국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그림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1997년부터는 교수를 하면서도 1년에 1번씩 전시를 열 정도다. 작가로서 작업할 때와 그림이 팔릴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이 작가의 세련된 감각과 미적 안목은 집안분위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간송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이 된다. 여기가 작가의 집이었으니 어려서부터 이런 문화재와 쉽게 접했던 것이다. 아니 여기가 놀이터였다. 그러니 작가가 부지불식 간에 받은 영향이 컸으리라. 작업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동영상] 보화각

지우기의 반복을 통한 그리기

 전인아 I '봉#4, 담#6-1, 담#7-1, 담#8-1'(왼쪽부터) 종이에 혼합재료 72×102cm 2017. 서양화에 비유하면 '모네'의 연꽃 연작이 연상된다.
ⓒ 김형순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의 특징은 작가가 맨손으로 문질러 그렸다는 점이다. '문지르다'라는 것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것이다. 지우기의 반복을 통해 그리는 이런 방식은 역설적이다. 서양이 '더하기'의 그림이라면 동양이 '빼기'의 그림인데 그런 면에서 무로 돌아가는 동양적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구상임에도 추상이 되어 버린다.

작업에서 붓을 사용하는 것과 손을 쓰는 건 분명 다르다. 맨손으로 그린 그림은 작가의 체취와 촉감과 온기까지도 담긴다. 일종의 '액션페인팅'이다. 현대미술의 화두는 몸이다. 손이 다 닳도록 그리다보니 색이 동이 되는 놀라운 순간도 맞으리라. 게다가 속히 훤히 보이는 수채화 효과가 난다. 이런 투명성은 21세기 시대정신이기도 해 모던해 보인다.


위 연작도 작가가 문질러 그린 작품이다. '담'이라는 제목이 궁금해서 작가에게 물었더니 "일상적이고 친근한 생활 속 정경 중 하나로 소박한 감성의 원초적 이미지를 연꽃이나 연못, 풀벌레나 개구리 등 근원적 자연물을 다룬 것"이라고 말한다. 또 "연꽃주변에서 더위를 식히는 풍류를 때 이르게 떠올리게 했다"는 설명이다. 그 뜻이 참으로 오묘하다.


이 '담'은 분명 고구려벽화에 새겨진 연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울산대 전호태 교수는 그의 해설에서 "벽화내부 연꽃무늬는 불교의 영향이다. 고구려인은 연꽃을 내세가 아니라, 조상신의 세계로 돌아가 현세를 연장시키는 자궁으로 삼았다. 거기에서 완전히 새롭고 자유로운 존재로 탄생하는 세계를 꿈꾸었다"라고 풀이한다.


판타지 같은 환상적 요소를 중시하다

 전인아 I '서산#1' 비단에 혼합재료 78×133cm 2017. 마치 21세기 '신선도'를 보는 것 같다
ⓒ 김형순

전인아 작품이나 작품명은 대체적으로 애매모호하다. 그 속에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설명을 해 주지 않으면 관객 입장에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좀 답답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모호성·불투명성으로 내 작업에 환상적 요소를 고조시킨다!"라는 작가노트를 읽어보니 이는 사뭇 작가의 의도적인 전략임을 알 수 있다.

또 예를 들어보면, 작가가 사람을 그릴 때도 성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무성이거나 중성이다. 그러면서 번지는 수성재료와 겹치는 색상을 즐겨 사용한다. 그래서 구상화인데도 추상화처럼 보인다. 이런 기법은 환상적이고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는 촉매제가 된다.

비단에 그린 작품 '서산#1'도 마치 신선이 노니는 이상세계 같다. 그런 환상적 세계가 펼쳐진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나 신화가 읽힌다. 작가는 이런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고구려 벽화뿐만 아니라 중국의 산과 바다에 나오는 풍물 지리서이자 상상적 동물을 나열한 '산해경' 같은 책을 많이 참고했단다.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은, 관객을 작업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시작할 뿐 그걸 완성하는 건 관객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관객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 제 나름으로 상상력을 맘껏 펼치면 참여할 여지가 많아진다. 그들을 통해 역으로 작가가 촉발시키려는 미적 환영이나 판타지는 더 커진다. 여기서도 그런 의도와 경향이 보인다.

 전인아 I '봉#3' 종이에 혼합재료 102×70cm 2017. 서양화로 치면 판타지 넘치는 '샤갈' 풍 같다
ⓒ 김형순

작가가 강조하는 '판타지'를 보니 백남준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1992년 도올은 백남준이 서울에 왔을 때 인터뷰를 청해 그에게 '노장사상' 등을 물었다. 그때 백남준은 장자의 판타지를 언급하면서 그보다 더 대단한 한국인의 판타지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내가 경기중학교 다닐 때 한문선생인 '천관우'에게서 노장사상을 배웠어. 노자 책은 5천 단어밖엔 안 돼 그런 대로 배울 만했지. 그런데 장자는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스케일이 더 크고 더 깊어. 노자를 뻥 튀기면 장자가 되는데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스케일과 판타지기 담겨 있어. 그런데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판타지가 넘치는 것은 바로 일연이 쓴 <삼국유사>야. 거기에 우리 민족의 놀라운 판타지가 담겨 있거든."


백남준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한국인의 판타지를 극찬했는데 작가가 추구하는 바도 이런 판타지 속 환상적 요소가 연출하는 것이리라. 위 '봉#3'에는 그런 열망이 화폭에 옮겨졌다. 이런 작품을 보면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어떤 상상력이 발동된다. '도연명'이 꿈꾼 무릉도원이나 판타지소설에 나오는 초자연적이고 영험한 세계를 보는 듯하다.


회화의 경계를 확장하다

 전인아 I 'Dyptich#1' 석고(Dental Stone) 73×61cm 2015
ⓒ 김형순

끝으로 작가는 아예 세포처럼 분열하는 회화작품을 번역해서 유토(油土)를 사용해 부조로 만든다. 2차원의 세계를 3차원의 조각과 융합시켜 회화의 범위를 넓힌다. 위에서 보면 회화에서 색을 빼 무색으로 처리했지만 그 입체성 때문에 그 표현력이 배가된다.

위 작품은 새와 인체, 물고기와 나뭇잎의 형상을 유기적으로 결합했다.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여러 자연물이 하나가 되어 춤추는 듯한 형상이다. 자연과 인간과 우주가 하나라는 동양적 우주관인 '천지인'의 상징적 은유인가. 하여간 관객의 눈길을 더 집중시킨다.


이 작품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작가에게 물었더니 "날갯짓을 그린 회화작품(shell of stock)에서 '색'을 배제하고 선적인 동세를 표현했다. 근원적인 모태인 매트릭스와 중앙에 '모아진 손'은 자연물과의 교감 및 동식물의 형태를 오가는 환상적 세계를 담았다"라는 설명이다. '환상, 교감, 매트릭스' 같은 작가의 키워드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덧붙이는 글 | 금산갤러리 장소와 소개 http://www.keumsan.org/ 전화: 02)3789-6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