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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내가 오해했던 그 남자, 마광수

바람아님 2017. 9. 9. 08:46
중앙일보 2017.09.08. 02:24

이단아로 살았던 그의 쓸쓸한 죽음
그는 페미니즘의 적이기만 했을까
양성희문화데스크
그가 죽고 그에 대한 글이 넘쳐난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죽어서 이루어진다는 게 맞는 모양이다. 시대를 앞서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얘기했고, 누구도 편들어 주지 않는 이단아로 살았던 그를 안타깝게 돌아보는 글이 대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빈소를 찾은 문인은 거의 없다. 문단에서도 ‘왕따’였고, 죽음에 이를 만큼 외로웠단 얘기다.

그에 대한 글을 쓰려다 문득 생각해 보니 그의 글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다. 그의 에로티시즘이 숱한 외설 시비를 낳고 심지어 법정에도 섰지만 그에 대한 나의 어떤 의견도 정작 그를 꼼꼼하게 읽는 데서 출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마광수, 세상이 말하는 마광수가 어쩌면 내가 아는 마광수의 전부였다는 뒤늦은 자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소설들이 한창 논란이 되었을 때 나는 고작 20대 젊은 여성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우습지만, 안경 너머 실눈을 치뜨는 비쩍 야윈 그가 긴 손톱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허리가 휘어질 것 같은 하이힐을 신은 ‘야한’ 여자를 노골적으로 욕망하며 온갖 성적 망상을 쏟아내는 모습은 감내키 어려웠다. 알다시피 거대 담론이 지배하는 1980년대 말이었다. 화장하거나 짧은 치마를 입으면 생각 없는 여대생이 되고,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부르며 스스로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이 ‘여성해방’이라 믿던 시대였다. 이후 90년대 욕망과 개인의 시대가 열리고 문화부 기자가 돼 리버럴리스트를 자처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한국 사회의 위선을 깼든 어쨌든, 여성을 성적 도구화하며 성 인식이 왜곡된 대표적인 지식인 남성으로서 마광수라는 첫 인식이 너무 강고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그의 부고 기사를 읽다가 92년 유죄판결을 받은 소설 『즐거운 사라』에 대해 검찰이 “끝까지 사라가 반성하지 않았다”며 여전히 유죄를 확신했다는 대목에 새삼 눈길이 갔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 사회가 법정에 세운 것은 단지 ‘변태 소설로 대학교수의 품위를 잃어버린 지식인 남성’만이 아니라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사라라는 부도덕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광수는 여성을 대상으로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펼치는 과정에서 여성에게도 성적 욕망이 있음을 드러낸, 그래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주목한 최초의 작가다. 그것이 마광수의 의도였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말로는 온갖 도덕과 진보와 성평등을 외치면서 실상은 ‘술기운에, 친근감을 표현하려고, 심지어 딸 같아서, 그리고 절대 기억 나지 않는’ 성추행이나 일삼는 세간의 이중적 남자들에 비해 훨씬 거짓 없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번역가 오진영은 ‘90년대에 마광수가 구속되고 대학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던 이유는 한국 사회의 위선적인 성도덕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는 여자 주인공이 자유로운 성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고 썼다. ‘이것은 마광수가 페미니스트라든가, 『즐거운 사라』가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광수 소설의 주인공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면, 그래서 남자가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리고 파격적인 성적 환상을 실현하는 내용이었다면 그 소설로 인해 문학가로서의 생명을 끊는 박해를 받았을까’ 이렇게도 물었다.


‘선생님의 수업은 매우 좋았다. 항상 시간을 꽉 채워,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문학적 기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있을 법도 한 야한 농담 따위는 단 한마디도 없이, 자신의 상상을 부추겼을 법도 한 수많은 여학생들에게 애매한 눈길 한 번 없이, 늘 진지한 문학 수업이었다.’ 마 교수의 제자였던 한 여성 페친이 페이스북에 올린 회고다.


다시 내 얘기로 돌아오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서야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나는, 우리는 그를 너무 오래 오해했다. 명복을 빈다.


양성희 문화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