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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아직 한국에서 기업을 하십니까?"

바람아님 2017. 9. 25. 09:43

(조선일보 2017.09.25 김대기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前 청와대 정책실장)


6·29 선언 후 경공업 내리막은 노사 분규·가파른 임금 인상 탓… 해외 이전한 기업만 살아남아

佛·日도 기업들 탈출 사례 있어

기업 때리기와 옥죄기 과해지면 생존 위한 탈출 상황 또 올 수도


김대기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前 청와대 정책실장김대기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前 청와대 정책실장


"아직도 제조업을 하십니까?" 1990년대 초 재계에서 유행하던 말이다. 

제조업으로 승승장구하던 우리나라에서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그 이유는 1987년으로 올라간다. 

노태우 대통령의 6·29 민주화 선언 이후 각계에서 다양한 욕구가 폭발하던 때다. 

노동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해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가히 경제민주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사업장은 매일 분규로 얼룩지고 임금은 해마다 두 자릿수 인상을 거듭했다. 

그 결과 기업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중소기업이 주도하던 경공업부터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4.2%에 달하던 매출액 대비 이익률은 1993년에는 0.47%로 급락했다. 

같은 기간 3.2%에서 2.2%로 떨어진 중화학공업에 비해 하락 폭이 훨씬 컸다.


노사분규와 임금 상승을 견디다 못한 기업들은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실제 이전한 기업들은 살았지만 남아있던 기업들은 거의 다 망했다. 

불과 5년 만에 제조업의 주축인 경공업이 무너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경제민주화가 중소기업에 먼저 타격을 주었다.


이후에도 노사분규와 임금 인상은 지속됐다. 

근로자의 욕구 자제를 위해 정부가 국민연금, 전 국민 의료보험, 최저임금제 등 굵직한 복지 시책을 대거 도입했지만 

소용없었다. 대기업들은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4배로 뛴 임금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는 없다. 결국 외환 위기를 맞으면서 모두가 무너졌다. 

임금이 오르면 내수가 활성화돼 성장을 이끌 것이라는 '소득 주도 성장'은 작동하지 않았다.


경제민주화 30년, 외환 위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제2의 경제민주화를 맞고 있다. 과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과거에는 고도성장 과정에서 희생당한 근로자에게 보상하는 차원이었지만 지금은 양극화에 기초한 반기업 정서가 

동력이 되어 기업들에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먼저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직을 확대하고 불공정거래 조사 강화에 나섰다. 

박근혜 정부 시절 기업들을 넌더리나게 한 특별 세무조사도 강화되는 조짐이다. 

여기에다가 공정위 전속고발권 폐지, 지배구조 개선, 집단소송법 도입, 사회적 책임 공시 등 각종 규제가 

기다리고 있어 기업들 걱정은 태산과 같다.



7월28일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장(가운데) 등 관계자들이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최저임금위원회의 2018년도 최저임금에 대한 이의제기서를 들고 입장을 발표를 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최저임금 인상과 통상임금 범위 확대도 타격을 주었다. 

관련 업계는 "이러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앞으로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임원 보수 공개까지 실현되면 인건비 상승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임금 상승을 통한 '소득 주도 성장' 실험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데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 부작용은 90년대와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기업인을 죄인시하는 사회 분위기이다. 

죄지으면 벌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요즘에는 정치적으로 희생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4대강 사업에 협조한 기업인들이 박근혜 정부 시절 대거 구속됐고, 방산 기업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곤욕을 치른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과 임원들은 대통령 말에 순응한 죄로 구속됐다. 

이런 식이라면 어느 기업인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요즘은 국회까지 기업인들을 불러 야단치고 있다.


지금 기업인들은 보호막도 없고 대변해 줄 사람도 없다. 

전경련은 무너졌고 경총은 정부로부터 야단맞은 이후 말 못하고 속으로만 앓고 있다. 

다른 단체들도 적극 나설 분위기가 아니다.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사법부이지만 여기도 예전 같지 않다. 

과거 사법부는 인기나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태산과 같은 무게로 사회를 지켰지만 지금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여론 뒤쫓는 성향은 더 짙어질 것으로 보인다.


기업인들이 뭇매를 맞는 데는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북핵, 사드 보복, 무역 규제, 인구 절벽, 금리 인상 등 기업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지나치게 몰아치면 

경제를 그르칠 수 있다.

 만약 선진국에서 이렇게 하면 기업들은 떠난다. 

프랑스가 좌파 올랑드 대통령 시절에 법인세 인상, 부유세 신설 등 증세 정책을 추진하자 대기업과 고소득자들은 

프랑스를 떠나겠다고 응수했다. 이후 경기 침체와 대량 실업을 못 이긴 올랑드는 증세 정책을 포기하고 오히려 

근로자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우파 정책을 시행했다. 

일본에선 반기업 정서가 아니라 인구 절벽 때문에 많은 기업이 해외로 나갔다. 본사마저 옮긴 기업도 있다.


이런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 기업인들은 애국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반기업 정서가 거세지고 기업인을 희생시키는 풍토가 계속된다면 생존을 위해 한국을 떠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몇 년 후 재계에서 "아직도 한국에서 기업을 하십니까?"라는 말이 나올까 봐 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