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동서남북] 수출도 두 쪽 내야 속 시원한 나라

바람아님 2017. 12. 21. 09:16

조선일보 2017.12.20. 03:15


무역의 날 수출 유공자 포상.. 단상에는 중소기업 수상자만
3년 만에 1조달러 회복 이끈 반도체 수출 대기업은 '찬밥'
김영진 경제부 차장

수출 전사(戰士)들의 축제인 '무역의 날'이 올해엔 대기업만 쏙 뺀 반쪽짜리 행사로 치러져 뒷말이 많다. 수출에 크게 기여해 금탑·은탑·동탑산업훈장을 받는 19명 가운데 삼성·LG·SK 등 4대 그룹 계열사 임원급 이상이 4명 있긴 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단상에서 상패 주고 격려한 수출 유공자 10명에는 한 명도 끼지 못했다. 단상에서 수상한 이들은 가족이나 신입 직원과 함께 나와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행사에 앞서 대통령과 별도로 티타임도 가졌다. 하지만 대기업 수상자들은 이런 대접에서 소외됐다. 40여 분간 자리를 채운 채 박수만 치다 돌아갔다.


수출 1억달러 달성을 기념해 1964년부터 열리는 무역의 날은 대통령이 참석해 한 해 동안 땀 흘린 수출 역군들을 치하하는 뜻깊은 자리다. 수출과 수입을 합해 무역 1조달러 시대가 열리면서 2012년부터 12월 5일로 날짜를 옮겼다. 해마다 700명 안팎인 수상자 가운데 대통령이 직접 상을 주는 수출 유공자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단상 수상자는 대기업 소속을 두어 명 포함시켰는데, 그 관례가 이번에 깨졌다. 무역의 날 행사와 단상 수상자는 청와대와 행사 주관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협의해서 결정한다. 산업부 관계자는 "올해 단상 수상 영예는 평소 대통령 만날 기회가 많은 대기업은 배제하고, 중소기업을 우대했다"고 설명했다.


중소 수출업체들은 마냥 반가워했을까. 한 중소기업 CEO는 "중소 수출인을 많이 선택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중소업체 일색이라 '우리만 대한민국 수출에 기여했나' 생각이 드는 어색한 행사였다"고 했다. 다른 중소기업인은 "대기업도 적절히 섞어줬던 관행을 따랐으면 모양새도 좋았을 것"이라며 "올해 무역 1조달러 회복은 반도체 덕분 아니었나"라고 반문했다. 올해 반도체 수출을 이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선 부사장과 본부장이 각각 은탑산업훈장과 동탑산업훈장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을 뿐, 대통령한테 변변한 치하 한마디 못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54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 앞서 무역의 날 수상자들과 사전 환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2017년은 수출 한국이 새로운 역사를 써낸 기록의 한 해였다. 무역 1조달러를 3년 만에 회복하고 세계 수출 6위 자리를 2년 만에 되찾은 것은 물론, 연간 수출은 6000억달러에 육박하며 사상 최고치 경신이 확실시된다.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도 역대 최고(3.33%)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수출 견인차는 단연 반도체다. AI(인공지능)를 위시한 4차 산업 특수에 힘입어 반도체가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수출은 갈수록 급증했다. 삼성전자는 올 1분기 30조원을 갓 넘던 수출이 2분기엔 37조원을 돌파하더니 3분기엔 39조원에 육박하며 분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반도체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3분기 수출은 GDP(국내총생산) 성장에 95% 기여했다. 수출이 사실상 끌어올린 3분기 성장률(전 분기 대비 1.5%)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올해 성장률 3%를 현실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가 없었다면 성장률은 2%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됐다. 2%는 반도체 호황이 일기 직전인 올 초, 국내외 투자은행과 연구기관들이 내놓은 가장 비관적 성장 전망치였다. 결국 곤두박질칠 수 있었던 한국 경제를 수렁에서 건져내 문재인 정부가 공약으로 내건 3% 성장을 달성하게 해 준 건, 해마다 수십조원을 반도체에 투자하고 수출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다.


이쯤 되면 반도체 수출 역군 한두 명쯤은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줬어야 했다. 글로벌 무역 대국의 위상도 되찾은 만큼, 크고 작은 무역인들이 서로 어깨 두드려주는 잔칫날을 만들어줬어야 옳다. 모두 구두끈을 고쳐 매고 내년에도 열심히 뛰자고 다짐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부는 무역의 날조차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편을 가르고야 말았다. 이래선 국민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없다. 그래도 될 만큼 우리 여건이 한가하지도 않다.

           
김영진 경제부 차장